여행의 기록
1.
어렴풋이 생각해 보면 시시했던 날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립지 않은 날이 없다. 기록의 다른 정의는 이것이다. 세상과 나를 아주 자세히 사랑하는 법.
내 삶을 두 개로 나눠야 한다면 기록하기 전과 후로 나눌 것이다. 기록의 수준에도 여러 가지 단계가 있었지만 정확히는 21년 즈음이다. '제대로'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내 기질적 가난과 알뜰한 성정을 발판 삼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아끼고 아껴서 되새김질해 이야기가 있는 기록으로 만든다. 이슬아 작가의 문장을 보고 무릎을 쳤다.
뭔가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지독한 짠순이인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장면이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가지거나 복원하려고 애쓰는 짠순이라고.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지속하는 힘'이 재능의 다른 정의라고 봤을 때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기록하는데 재능이 있다. 기록하는 행위는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촘촘하게 바라보고 더 다정한 시선으로 다가가게 했고, 순간순간에 몰입하게 해주었다. 일상에서도 이런데 여행에서는 오죽할까. 내게 여행은 기록의 정수와도 같은 귀한 시간이다. 촉각을 곤두세워 이국의 순간들을 주워 담는다. 맛집의 메뉴판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그곳의 감성을 조금 더 담기 위해 많이 걷는다.
2.
내 글의 가장 열렬한 독자는 대부분 나다. 그다음 기대하는 독자는 기록의 첫 이유이기도 했던 아이다. 심이가 아주 어렸을 때, 이 눈부신 시절의 이야기를 아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한없이 애틋해 쓰기 시작했다. 혹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이 곁을 일찍 떠나야 한다고 해도 기록은 영원히 남을 테니 아이는 덜 외로울 것이라 믿으며 계속 써나갔다. 가끔 성년이 된 아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엄마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을 읽고 깔깔 웃는 장면을 상상한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얼마나 웃음이 많은 아이였는지, 옆에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게 되겠지.
여행에 대한 기록은 조금 다르다. 우선 읽는 사람의 범위가 넓어진다. 이베리아반도 3주 여행을 앞두고 여행의 모든 정보를 꼼꼼하게 적어 블로그에 포스팅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생과 함께 하는 긴 유럽 여행'이라는 달콤하지만 막막한 프로젝트에 한 분에게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안 그래도 최선을 다해 깨어 있는 영혼을 시시각각 깨우며 조금 더 열심히 여행한다. 호텔별 초등학생 추가 금액, 렌트카 정보와 유명 맛집의 시그니처 메뉴 가격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돈이 되지도 않는 기록에 뭘 그렇게까지 했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그 안에서 내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영혼을 갈아 넣은 그 콘텐츠는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몇 개의 계절을 넘어 댓글도 달린다. 오랜만에 달린 댓글을 읽으며 나는 다시 그 시절로 소환당하고 또 한 번 여행한다. 기록의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3.
20여 일을 여행했지만 기록을 통해 나는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대만에 푹 빠져 지냈다. 다시 꺼내보지 않았다면 스쳐 지나갔을 법한 순간들도 세세하게 살려내 알뜰히 소화시켰다. 기록의 과정을 통해 별생각 없이 먹은 음식의 역사를 찾아 감탄하기도 하고, 우연히 들었던 노래를 찾아서 듣고, 다시 한번 더 가야 할 이유를 수없이 만난다.
가끔 예전 여행 기록을 보며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대견해하기도 한다. 여행지는 판이하게 달라도 기록은 이어진다. 내가 여행에서 찾고 싶은 순간들은 비슷하니까. 제일 놀라운 점은 그때의 고민이 여전히 지금의 고민이고 그때의 해답이 여전히 지금의 해답이라는 것. 비범한 정답을 품고 있는 평범한 기록을 읽으며 쪼그라든 가슴을 편다. 이렇게 조금씩 완성된 기록은 나를 언제나 위협하는 '3자'의 세계(자괴감, 자기 비하, 자포자기)를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방패다. 김미경 선생님의 강의보다 두터운 자존감의 원천이 된다.
기록에는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방법이 있다. 춘은 다양한 도시의 하늘만 담아 따로 포스팅한다. 그의 SNS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구름이 떠 있다. 심이는 영상에 더 익숙한 세대답게 모든 순간을 짧은 영상으로 남긴다. 도시별로 마음에 드는 스팟에서 똑같은 춤을 추고 마치 한 곡처럼 편집해 업로드하고 자막까지 달아 여행 브이로그를 만들었다. 결과물이 너무 그럴듯해서 짐짓 놀랐다.
자신만의 기록 방식을 찾는다는 건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작은 노트를 사서 한 문장을 적어도 좋고 필름 카메라에 풍경을 담아도 좋고 영수증이나 티켓을 모아도 좋다. 흘러가는 지금을 붙잡아 영원의 이름표를 붙이자.
매일 걷고 매일 쓰는 도시산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