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장난감 오르골 배경음악으로 ‘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왔다.
얼마 만에 듣는 ‘엘리제를 위하여’인가 싶어서 반가운 마음에 흥얼거렸더니 궁금한 것 많은 심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이 노래 알아?”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는 심이는 TV에서, 라디오에서, 길에서 들리는 노래를 내가 따라 부를 때마다
내가 많은 노래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한다.
항상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엄마, 이 노래 어떻게 알아?”하고.
‘엘리제를 위하여’는 내 또래라면-특히 여성- 열에 아홉은 한 번쯤 쳐봤을 곡인데,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한 번씩 스쳐 지나간 경험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땐 왜 그렇게 다들 하나의 코스처럼 피아노를 배웠을까? 어쨌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베토벤의 명곡이라는 것도 흘려듣고 악보에 ‘바를 정’자를 그리며 지루하게 연습했었다. 그랬다. 정말 너무 지루했다.
그래서 어느 날 큰 맘을 먹고 엄마에게 눈이 나빠져서 악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피아노를 계속하기 어렵겠다고 얘기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핑계인데 신사임당처럼 마음이 너그러웠던 우리 엄마는 별다른 꾸지람 없이 그 지루함을 끝낼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렇게 내게 엘리제를 위하여는 특별할 것 없는 추억 속의 명곡 정도로 남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클래식은 내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철에서 늘 들을 수 있었던 비발디의 사계까지 안 가더라도,
중, 고등학생 시절 일 년의 가장 마지막 날에는 하나의 가족 행사처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송년 음악회’를 보러 가곤 했었다.
음악 시간에 따분하게 배웠던 ‘모차르트 운명 교향곡’이나 ‘브람스 교향곡’ 같은 고전들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금난새 지휘자가 곡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가끔 연주자가 틀리거나,
연주자들이 고별교향곡을 연주하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거나 하는 퍼포먼스를 할 때면
(고별교향곡은 하이든이 가족들을 오래 못 만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든 곡으로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촛불을 끄며 하나둘씩 퇴장해 마지막에 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만 남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평민들이 격무에 시달리는 건 비슷)
꽤 인상적인 기억인데도,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클래식을 사랑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고 놀라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나도 문득 이 노래가 너무 새로워져서,
‘빌헬름 캠프’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찾아서 심이와 함께 들었다.
어머나. 그 지루했던 멜로디가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아이와 한참을 숨죽이며 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은 가끔 이렇게 선물 같은 순간을 전해준다.
“엄마, 엘리제가 누구야?”
궁금한 게 많은 심이를 위해 이것저것 찾아본다.
"엘리제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
은재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그러잖아? 베토벤 삼촌도 그런게 아니었을까?"
심이가 신이 나서 자기도 친구를 위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며 엉망진창인 노래를 만들어서 부른다.
이 작은 사건으로 클래식을 다시 듣게 됐다.
내겐 어렵기만 했던 세계였는데 문을 살짝 열어보니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싱그럽고 자연스럽다.
익숙한 멜로디의 지루함이 정겨움과 놀라움으로 변한다. 피아노, 첼로의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잠들기 전 쇼팽의 ‘녹턴’을 함께 듣고, 비발디의 ‘사계_봄’으로 아침을 열어본다.
독수리 타법으로 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부분을 쳐보는 아이를 보며 나도 문득 다시 피아노로 이곡을 쳐보고 싶어졌다.
그 지루했던 바를 정자도 이제는 결코 지루할 것 같지 않은 느낌.
천천히 낯설게 보기, 천천히 낯설게 듣기.
“클래식을 당신 밖에 살게 하지 마세요. 클래식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즐길 대상입니다. 공부의 대상이 아니에요. 많이 아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얕게 알려고 하지 말고, 깊이 보고 들으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덟 단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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