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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루이 Apr 21. 2020

지난 93일간의 기록

삶을 적다

오늘로 아이와 매일 24시간 붙어 생활한지 

정확히 78일이 되는 날이다. 


시작은 미약했다. 

1월 중순 아이의 짧은 겨울 방학이 있었고, 

심이를 많이 보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해 짧은 한국 방문을 기획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한국에 6일 머물 계획으로 가볍게 짐을 쌌다. 

6일간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그리고 오늘까지 베이징에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 한국에 왔던 1월 중하순 무렵, 

각종 미디어에서 코로나 특집 뉴스를 빵빵 틀어댈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아니 사실 좀 유난이다 싶었다. 

베이징에서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데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이니 나의 무딤은 이유가 있었다. 


홍콩에서 남편을 만나 디즈니랜드도 가고, 

함께 베이징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디즈니가 갑자기 폐쇄됐다. 

거짓말처럼 중국 전체가 휘청거렸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중국에서 온 죄인이 되어 호텔에 틀어박혔고, 베이징행 비행기 표를 취소해야만 했다. 


초반 호텔 격리 기간에는 좋은 점이 있었다. 

우선 태어나서 한 호텔에 1주 이상 묵는 첫 경험이었다. 

2주가 지나자 아이는 호텔의 모든 공간을 파악해 호텔 직원을 놀래켰다. 


무엇보다 베이징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함께 먹는 평일 저녁은 특별한 이벤트였던 남편과 하루 세 끼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아이도 오랜만에 갖는 세 가족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거워했다. 


호텔에 이렇게 오래 살아도 되나 싶었던 2월 중순, 

회사의 부름을 받고 남편이 베이징으로 급히 떠났다. 


아무도 없어 텅 빈 우주선처럼 거대하던 인천 공항에서 중국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했다. 

전쟁터에 가족을 보내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평소에도 얼굴 볼 시간도 없었으면서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애틋했다. 


꼭 마스크 잘 쓰고, 세 끼 잘 챙겨 먹고, 절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면 안 돼, 몇 번이고 당부하며 손을 흔들었다. 


달리는 공항버스 차장 너머로 어둠이 깔리고 

마음이 심란해진 나는 언젠가 보려고 아껴두었던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봤다. 


한때 정말 사랑했던 연인이 결국 헤어져 먼 훗날 우리가 되고 마는 스토리에 마음이 한층 더 슬퍼지면서 공항버스에서 훌쩍 훌쩍 울었다. 

그래도 중국 상황이 괜찮아지면 2~3주 뒤에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게 그때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오빠는 베이징 집에서 2주간의 자가격리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평소 대장금 뺨치는 요리 실력을 맘껏 발휘하며, 

내가 집에서 차려주던 밥 보다 오조오억 배 정도는 더 잘 챙겨 먹으며. 


그러는 사이 상황이 역전됐다. 

한국 내 확진자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남편이 한국에 남은 우리를 걱정했다. 

나와 아이의 베이징행도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동안, 베이징 착륙 후 전원 체육관으로 가서 검진을 받아야 하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베이지 가는데 비행시간 2시간인데, 

공항에서 집까지 무려 12시간이 걸리는 이상한 상황에 빠졌고, 본인 집 자가 격리에서 자기 부담 호텔 격리로 바뀌었다. 

입국자 전원 핵산 검사를 한다느니, 한국인 집 문 앞에 못을 박아놓는다느니, 각종 루머에도 시달렸다.


뉴스를 보다 보면 대체 내가 알던 그 유럽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움이 한층 가증될 무렵, 

현명한 행동파인 친구는 ‘더 꾸물거리다가는 곧 입국 자체가 막힐 것 같아’하며 과감하게 베이징행 표를 끊었다. 

그래도 아직 중국보다는 한국이 안전하지 않을까... 소심하게 반문했다. 


그리고 다음날 베이징에 있는 중국 친구들의 위챗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들은 한국에 있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얼른 중국으로 들어오라고 강하게 얘기했다. 

베이징은 이제 안정기고, 한국은 이제 시작처럼 보인다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중국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며칠 뒤, 

갑자기 베이징시는 향후 모든 국제 항공기는 베이징이 아닌 경유지 우선 착륙 후 그곳에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했으며, 

경유지에서 확진자가 나올 경우, 같은 비행기에 탄 승객들도 경유지에서 14일 격리를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곧 외국인 전면 입국 금지를 선언했다.


매일 아침 눈 떠보면 무시무시한 소식이 도착해 있어서 핸드폰을 보기가 살짝 무서웠다.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버라이어티하고, 강렬한 시나리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 무언가였다.


그러는 사이 아이 학교는 이러닝을 시작했고, 

영국 선생님들은 8시간의 시차를 극복하며 양질의 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엄마들도 물론 마찬가지다. 

이것이 아이의 숙제인지, 내 숙제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 왜 아이의 영어가 늘지 않고, 내 영어가 늘고 있는 것인지 끝없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매일 폭탄처럼 쏟아지는 과제를 해치우느라 의문의 해답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영어 타이핑에 서툰 아이는 종종 내게 긴 텍스트 타이핑을 부탁했는데 

아이의 귀여운 영어 문장들을 듣고, 치고 있자니, 

어느 부분에서 스펠을 틀려야 의심받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고민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새삼스레 내가 천사 같은 나의 아이를 과대평가하고 있었구나~그랬구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외쳐야 했다.

이 시간은 아마도 아이 출생 이후 처음으로 내 아이를 360도로 돌려보며 이해하는 시간이자, 

아이에 대한 나의 기대와 착각, 그 사이에서 자아분열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게다가 내 공부도 절대 놓칠 수 없는 

38살 아줌마의 치열한 싸움의 기록과도 같을 것이다. 

이제는 나보다 말도 야무지게 하는 8세 딸아이와 24시간 함께하며 성격 급한 일인으로서 

눈높이 교육을 해내기가 얼마나 힘든가,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나마 조부모님과 함께라 잘 버티고 있다)


그간 내가 아이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좋은 엄마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인성이 끝내줘서도, 우리 아이 실력이 월등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학교에 갔기 때문이었다.


아이에게, 내게, 하루 8시간 서로 각자의 세상에서 살 수 있었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세상과 아이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기로 했다. 

모든 것을 비워내고 이 전 세계적 재난과도 같은 상황에서 

건강하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직 몸을 부대끼며 세 끼의 식사를 먹어 치우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물론 엄마는 몇 달 치 생활비 이미 탕진각…)


이 시기를 보내며 굉장히 고무적인 점은 

쇼핑 또한 여의치 않고, 물욕 또한 사라진 관계로

6일 치의 옷으로 93일을 버티고 있다는 데 있다. 

20대의 나는 <93일 동안 매일 다른 옷 입기 대회>에 나가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였는데,

그런 내가 이 어려운 것을 해내고 있다.


정말 6일이 93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는데, 

6일이 100일...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문득문득 


방문을 닫아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엄마표 김치찌개 냄새처럼 나를 덮쳐온다. 


한여름의 양재천까지 목도하고야 말 것인가! 


아무리 초강력 울트라 낙천적인 나라도 속이 울렁거린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라고 목청 높여 불렀던 가수의 믿음이 

이번에는 어긋나주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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