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요일, 남편이 물었다.
“회사 관둘 수 있어?”
“응, 왜?”
특별한 고민 없이 대답했다. 육아 휴직을 빼고는 11년간 연속으로 한 번도 쉬지 않고 회사 생활을 했지만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고집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진짜 관두게 될 줄 알고 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남편은 월요일에 진짜 주재원 면접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면접을 보고 오자, 남편은 말했다.
“이제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아, 가야 할 것 같아”
4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니하오밖에 못하는 주제에 어디를 간다고? 싶었지만 나는 냉정해져야 했다.
다니던 회사에 급하게 이 사실을 알렸고, 2시간 뒤 후임자를 뽑는 채용 공고가 올라갔다.
남편의 발령은 예상보다 빨리 진행돼 남편은 국제 미아를 간신히 면할, ‘니하오’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는 수준에서 급히 중국으로 떠났다.
나는 남편이 떠난 후에도 업무를 마무리하느라 갑자기 비상 이슈가 터진 주말에는 진정한 독박 육아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렇게 갑자기 백수가 되었다.
백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외부 요인에 의해 백수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심이의 미술학원을 알아보는 것보다 오히려 명료했달까. 지금까지의 생에서 나는 굵직한 변화를 대부분 스스로 결정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샤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자유를 선고받고 이런 상황에 내던져졌다.
이것이 내 커리어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담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송별회 때 나는 울고 말았다. 옆에 앉은 부장님의 눈물과 소주가 90%인 아름다운 소맥을 3잔 정도 원샷 하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취기가 오르며 그냥 눈물을 훔친 아니라 엉엉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일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어쩌면 남편보다 나의 사정을 속속 알고 있는 동료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때 편의점 계단 옆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던 내 옆에 있던 차장님은 심지어 전혀 취하지도 않아서 새벽에 집까지 태워주기까지 했다. 다음 날에는 퉁퉁 부어 도저히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심지어 출근도 했다. 그 이후로 2주를 더 다녔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직 후 3년. ‘치열했다’고 밖에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시간 동안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좋은 경험을 쌓았다.
매일이 전쟁이고 아내와 엄마로써 엉망진창이었지만 나는 689개 정도의 위기를 겪으며 확실히 더 담대한 인간이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회사를 관두며 워킹맘들에게는 부럽다는 얘기를, 전업맘들에게는 아깝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둘 다 참 맞는 말이다.
한 편으로는 내게 닥칠 앞으로의 낯선 시간이 기대되고, 한 편으로는 이 악물고 버텼지만 꽤 즐거웠던 지난 시간이 그립다.
하지만 무엇보다 ‘외국인 노동자’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오빠를 응원한다.
오빠의 선택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의 멈춤’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그간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주고 응원해 준 오빠의 힘이다.
우리가 함께 갈 새로운 길이 생각보다 더 힘들고, 혹은 우리의 예상보다 짧게 마무리될지라도 괜찮다.
새로운 길 위에서 우리는 셋이 함께 더 많이 울고, 웃을 것이 분명하니까.
기대와 우려, 설렘과 두려움이 완벽하게 혼재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