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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따사롭게 마을 전체를 비추는 어느 날 나는 그녀와 함께 계곡에 갔다. 나는 신나게 물장구를 튀기며 그 물속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며 놀았다. 그녀는 물가 근처에 앉아 있었고 주변 풍경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었다.
어느 날 조금씩 커지는 노을이 노랗게 소나무를 물들이고 있을 무렵 그녀와 나는 숲을 걸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고개를 자주 그녀를 향해 돌렸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 눈을 맞추고 말했다.
"사랑해."
그녀는 울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우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녀는 쏟아져 나오는 울음 힘겹게 멈춘 채 까치발을 살짝 들어 내 입술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맞췄다. 나는 순간 온몸의 전율을 느꼈고 그 잠깐의 입 맞춤은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다.
꿈을 꿨다. 꿈속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 앞으로 어슬렁거렸다. 그러고는 나의 방으로 향했고 내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지럽혔다. 그것을 지켜보던 나에게 고양이가 천천히 다가왔고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혀로 내 손을 핥았고 나는 고양이를 내 품에 안았다. 갑자기 내 어깨 위로 올라타더니 머리로 내 볼을 비볐다. 그러다 갑자기 조그마한 발톱으로 내 얼굴을 할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급하게 뒤로 젖혔고 고양이는 높은 나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고양이는 방을 뛰 쳐 나갔고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서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것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열린 문을 통해 마당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두웠고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고양이는 어딘가를 향해 뛰어갔다. 나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고양이를 따라 한참을 뛰었다. 그러다 멈춘 곳은 너무 어두워서 잘 볼 수 없었지만 희미하게 큰 소나무가 보였다.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고 나무 밑에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뒤 돌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소녀였다. 소녀는 가냘픈 맨 손으로 흙을 파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옆에 쌓인 흙으로 다시 채웠다. 그러고 일어섰다.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순간 하늘은 빤짝였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녀는 숲 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환함이 그녀의 앞을 비췄다. 그녀는 계속 걸었고 어느덧 앞에는 익숙한 계곡이 나타났다. 거센 빗속에서 계곡물은 흡사 파도와 같았고 그녀는 그곳을 한 발짝씩 걸었다. 계속 걸어 나갔다. 물은 깊어져 갔지만 그 거센 파도 속에서도 그녀는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물속으로 한 걸음씩 사라져 갔다. 더 이상 그곳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잠에서 깼고 온몸은 흘린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집을 나와 소나무를 향해 달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주변에 핀 수채화, 진달래, 개나리 등의 알록달록한 꽃들은 다시 온 봄을 춤을 추며 반기고 있었다. 소년은 마침내 소나무에 앞에 왔고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미친 듯이 땅에 있는 흙을 파 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무언가가 그의 손에 닿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을 더 팠고 거기엔 젖은 채 여러 조각으로 찢어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의 그림이 있었다. 소녀는 소년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소년과 소녀가 살았다. 소년은 순수했고 소녀는 소년보다 성숙했다. 소년은 소녀를 사랑했고 그녀 또한 그를 사랑했다. 소녀는 성숙했기 때문에 사랑은 영화와 같아서 시작하는 순간 결국 끝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사랑을 구했고, 소녀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소년은 울었고, 소녀 또한 울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