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생각이 내 속을 까맣게 태웠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제일 처음 밥을 받고 내 자리에 왔다. 수저통을 열지 않은 채 민혜를 기다렸다. 복도에서 배식을 받은 그녀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민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했다. 나는 식판을 들고 그녀를 따라갔다. 민혜의 식판은 거의 숟가락을 대지 않는 듯 깨끗했다.
“많이 아파?”
“아냐 괜찮아.”
“좀 걸을래?”
“아니, 비 오잖아. 아파서 좀 쉴래.”
그녀와 나는 몇 초간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교실 안으로 떠나버렸다. 두려웠다. 나에 대한 마음이 떠난 게 아닌지.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누구보다 낯설게 느껴졌다. 다시 과거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우산꽂이에 있는 우산 중에 아무거나 챙겨서 복도를 나섰다. 계단들을 빠르게 내려가 교문 밖을 나갔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수 만개의 빗방울들만이 차갑게 떨어지고 있었다.
빗속을 혼자 걸었다. 너무나 착잡했다. 심지어 그녀가 미워지기도 했다. 나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찌푸리고 입술을 떨면서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었다. 머릿속에는 민혜와의 온갖 추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단 한 번도 그녀가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내지 않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미소 그 자체였고, 나는 그것에 이미 중독되어버린 환자였다. 그녀의 환대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순간 그녀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제발 나에게 다시 사랑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떠오르는 망상들에 사로잡힌 채 나는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빗소리에 섞인 예비 종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나는 모든 기력을 잃은 채 교실로 향했다.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민혜 어디 갔어?”
“몸살이 심해져서 조퇴했어.” 은정이 대답했다.
“많이 아프데?”
“응. 민혜 엄마가 오셔서 데리고 가셨어.”
“이모가 아니고?”
“응. 오늘은 엄마 집에 가는 날 이래.” 그녀가 말했다.
나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내 자리로 갔다.
“민혜가 이거 너한테 전해주래.” 정민은 딱지 모양으로 접힌 종이를 나한테 건넸다.
“별 말 없었어?”
“응. 전해달라고 하고 가던데? 많이 아파 보였어.”
나는 곱게 접힌 그 종이를 펼쳤다.
아프다고 너한테까지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오늘 엄마를 만나는 날이야.
엄마 집에는 오랜만에 가봐. 갔다 와서 엄마랑
뭘 먹었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전부 얘기해줄게.
빨리 내 몸 상태가 나아져서 다시 너랑 들판에
가서 피아노를 같이 치고 싶어.
너를 진짜 정말 좋아해.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도 순수하게 나를 좋아하는 그녀인데, 나만 혼자서 이상한 망상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편지를 접어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그녀에게서 첫 번째로 받은 선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신발장엔 아버지 신발이 있었다. 거실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휑했다. 페트병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내 방으로 들어가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다. 민혜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민혜는 나에게 아낌없이 주고 또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깨달았다. 미소를 주지 못하더라도, 나를 밀쳐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 또한 그녀였다. 나에게 잘해주기만 하는 그녀가 아니라 흔들리는 인간으로서의 ‘그녀 자체’를 사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학교로 향했다. 왠지 기분이 산뜻했다. 이번에도 역시 공원을 가로질러서 등교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쪽으로 가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햇볕이 쨍쨍했다. 그녀와 함께 들판을 걸어 다니고 싶었다.
교실에 도착하니 몇몇 애들만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내 자리에서 노래를 들으며 창가 쪽을 바라봤다. 교실은 곧 북적북적해졌다.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은영마저 보이지 않았다. 곧 정민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일 있어?”
“너 소식 못 들었어?" 그가 말했다.
“무슨 소식?”
그제야 교실의 무거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무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주, 죽었데.”
“누가?”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냐고?”
“미, 민혜가.”
“무슨 개소리야? 민혜가 왜 죽어?” 나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반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