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줄게. 지금 생각해봐!” 우리는 해변 한가운데 멈춰 섰고 바다를 향해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뭐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딱히 없어. 그냥 솔직하게 살고 싶어. 생각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살면 좋을 것 같아.”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너의 진지한 생각까지 들을 수 있다니. 영광이야. 선생님으로서 뿌듯해. 그리고 있잖아. 너는 노래랑 정말 어울려. 나는 찹쌀떡처럼 너와 음악 사이에 계속 찰싹 붙어 있겠어.” 그녀는 킥킥대며 말했다.
“너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나는 머쓱해져서 질문을 넘겼다.
“나? 음 글쎄... 양호선생님처럼 나도 힘든 사람들을 돕고 싶어.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싶어.”
“너랑 잘 맞는 것 같아.”
“사랑 전도사가 되는 거지. 그렇지만 모두에게 다 똑같은 마음을 주기는 정말 힘든 것 같아. 참 신기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한테처럼 이런 사랑은 줄 수 없을 것 같아. 너는 특별하거든. 네가 하는 말을 전혀 지겹지 않고, 네가 듣는 노래는 모두 아름답고, 너는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었어.
그런데 있잖아. 가장 행복할 때 불길한 상상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나중에 네가 내 곁에 없으면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이 들어.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너를 좋아할수록 불안감도 조금씩 커져가. 내 곁에 계속 있어줄 거지? 어디 안 떠날 거지? 내가 싫어지면 꼭 미리 말해 줘야 해!”
“절대 안 떠나.”
해는 바다 밑으로 떨어졌고 어느새 반대편에서 떠오른 동그란 달이 우리를 살며시 밝혀주었다.
하루가 지나고 일요일이 되었다. 민혜는 이모와 이모의 남자 친구랑 함께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녀를 보려면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치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처럼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하루 종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그녀와의 추억들을 소환해냈다. 그녀가 했던 말들, 특유의 표정, 그녀가 고민할 때 비비 꼬던 머리카락 등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환영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어찌 됐건 시간은 흘렀다.
드디어 다음날이 되었다. 새벽 5시에 잠이 깼다. 한참을 뒤척였지만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1시간이 더 지났다. 가만히 방에 누워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씻고 집 밖을 나왔다. 해가 저 멀리서 스멀스멀 기어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어둑어둑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었다. 아침 공기는 맛있었다. 늘 가던 최단거리로 가지 않고 공원을 거쳐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공원 입구에 다가서자, 연두색 세계가 펼쳐졌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나를 반겼다. 몇 걸음 거리에 연못이 보였다. 물레방아가 바위 쪽에서 떨어지던 물을 실어서,수표면을 향해 던지기를 반복했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빨간색과 하얀색 얼룩이 붙어있는 금붕어들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몹시 평온해 보였다. 수풀을 뛰어노는 참새들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랄 게 전혀 없어 보였다.
이마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학교로 달려갔다. 최대한 지붕이 있는 길 쪽으로 뛰었다. 곧 익숙한 건물이 보였고 그 안으로 있는 힘껏 달려갔다.
7시 반의 학교는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휴지로 몸을 닦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 혼자 들어섰다. 그녀의 자리가 보였다.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그려졌다.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옷이 비에 젖어 기분이 찝찝했다.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흔들었더니 닦다 남아 말려버린 휴지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신발도 젖어서 벗어버렸다. 창문 너머로 교문 쪽을 보니 학생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실은 아이들로 붐벼갔고 주변은 점점 시끄러워졌다. 곧 종이 울리고 교실에는 한 자리를 제외한 모든 자리가 가득 채워졌다. 민혜는 결국 수업 전까지 오지 않았다.
종이 울렸다. 나는 그녀의 짝지 은영에게 물었다.
“민혜 왜 학교 안 와?”
은영은 민혜랑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러게. 학교에 지각도 한 번도 한 적 없는 애인데.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너희 둘 항상 붙어 다녔잖아.”
2교시가 시작됐다. 나는 턱을 개고 뻔히 창문 너머만 바라보았다. 축축축 소리와 함께 빗방울들이 창문에 부딪혔다. 비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민혜 왜 학교에 안 왔어?” 내 옆자리에서 필기를 열심히 하던 정민이 물었다.
“몰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글쎄. 아파서 못 오는 건 아닐까?”
“그렇겠지?”
그녀를 알기 전까지 정민은 나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덧 나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다시 창문을 바라봤다. 빗물에 왜곡된 유리창 속에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노란색 우산이었다. 그 속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내 시야 속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 드르륵 문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잠깐 멈추고 모든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민혜였다. 문 앞에 놓여있던 우산꽂이에 그녀는 자신의 우산을 집어넣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하얀색 우유처럼 창백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수업 내내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수업 종이 울리자마자 민혜의 자리로 갔다. 그녀는 은영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우리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나는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 내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대화를 요구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