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석은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가 바닷속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온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경치를 바라보았다. 이내 해가 저물었지만 아직 섬이 완전히 어두워지진 않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걸으며 온갖 잡념에서 벗어나 최대한 지금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려고 했다.
지석은 곧 두 번째 해변에 도착했다. 그는 신발을 벗은 채 양손에 들고 부드러운 모래를 느끼며 걸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모래에 발이 푹하고 꺼졌다. 곧 발에 물이 닿는 곳까지 왔고 모래가 물에 뭉쳐서 더 이상 그의 발이 빠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왼쪽으로 돌려 파도와 나란히 걸었다. 모래에 발이 잔뜩 묻을 때마다 바닷물이 몰려와 깨끗이 씻어주었다. 물은 차갑고 따뜻했다. 이제 햇빛이 남겨놓은 잔상도 사라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다. 그는 주머니에 있던 손전등을 꺼내 앞을 비췄다.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그는 주변으로 불을 비추며 천천히 다가갔다. 지석의 심장은 망치로 누가 때리는 듯이 쿵쾅거렸다. 그 형체가 점점 뚜렷해졌다. 긴 생머리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어떤 여자가 노란색 매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였다. 그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네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당장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장나버린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손전등을 끄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같이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온 마음이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걸음 옆에 그녀를 두고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할수록 그의 숨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지석은 최대한 용기를 내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서인지 그녀가 내뿜는 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은 아까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지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살짝 돌리고 그녀를 보았다. 그때 그녀의 시선은 바다가 아닌 하늘을 향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렸다. 하늘에는 수놓은 듯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랏빛의 거대한 오로라가 그 별들을 품에 안고 우주의 한가운데서 마치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서 매트를 접더니 원피스에 묻은 모래를 털고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사실 그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모른다.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과 별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한 그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녀의 세상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온 우주의 별들이 그를 향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석은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저 한 마디라도 걸었다면, 한 번이라도 그녀와 눈이 마주쳤더라면, 한 순간만이라도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다. 다시 한번 그녀를 찾아서 그때는 그녀의 세상 속에 들어가겠다고 그는 굳게 다짐했다.
“꾸우우윽” 배에서 꾸르륵 신호가 들려왔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 소리에 눈물이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는 자신을 또 한 번 저주했다.
이번에는 목이 타듯 말랐다. 그는 캐리어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셨다. 그러자 그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담요 하나를 덮고 셔츠 두 개를 베개 삼아 바로 잠자리를 완성했다. 그곳에 누워 그는 금세 잠에 들고 말았다.
6
지석은 무언가 그의 목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자 자그마한 게 한 마리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해는 이미 높이 떠있었다. 몇 마리의 갈매기가 그의 주위로 날아다녔다. 그는 옷과 담요를 캐리어에 집어넣고 해변의 밖으로 걸었다. 눈앞에 허름한 식당이 보였다. 그는 드르륵 소리와 함께 그 낡은 곳에 들어갔다.
늙은 할머니가 나왔다. 그는 메뉴판을 보고 꽃게 정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전날 있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꿈을 꾸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그때 그녀에게 말을 걸었어야 했다고 끊임없이 자책했다. 허리가 깊게 굽은 할머니가 동그란 쟁반을 들고 나와서 테이블에 얹어놓았다. 그는 수저를 들었다. 사실 그는 기억 속에 그녀를 떠올리려고 애쓰느라 음식의 맛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식사를 끝마쳤다. 그는 할머니를 불러 돈을 내고 다시 드르륵거리는 문을 열고 밖을 나왔다.
태양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분명 해가 뜬 지 얼마 안 됐을 때 밥을 먹으러 들어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내 그녀 생각에 심취해있느라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둑어둑해진 길을 다시 걸었다. 바람이 제법 불어 그의 피부를 때려댔다.
주변엔 지석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점을 처음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치 통행금지 시간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저녁만 되면 집안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혹은 다들 어둠 알레르기가 있어서 햇빛이 없는 밖에서는 견딜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를 봤던 해변을 다시금 걸어보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생각해보니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 그녀를 처음 본 것도 밤이었고 두 번째 마주쳤을 때도 밤이었다. 그는 까마득한 밤에만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분명 떠오르고 있었던 해가 그가 식당에 간 사이에 다시 졌다는 사실도 뭔가 이상했다.
지석은 왠지 하늘이 그가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의 안에 있던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를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녀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떠오른 가정에 그는 집착하게 되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