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석은 눈을 떴다. 몸이 여전히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래서 자신이 아직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에게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문 쪽을 봤을 때 그곳을 비추는 빛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불안함과 들뜸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는 오두막을 나와 좁은 골목을 따라 해안가로 향했다.
첫 번째로 보이는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 해변을 향해 계속 걷다가 조바심이 나서 뛰기도 했다. 곧 지쳐서 다시 걸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그녀에게 걸었으니 그에게 사실상 자유란 전혀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안 만나고가 그의 앞으로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고 운명에 굴복해 목줄에 묶인 채 끌려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지석은 곧 다음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는 출렁이는 바다 가까이에 가서 모래사장에 누웠다. 잔잔한 파도 소리, 살랑대는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몸에 긴장이 풀리고 포근한 느낌이 그를 감쌌다. 순간 무언가가 섬광처럼 반짝였다. 하늘에 엄청 큰 별 하나가 떨어지더니 곧 열 개 정도의 작은 별들이 그것을 따라 추락했다. 그는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지석은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저 멀리 해변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게 그녀일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뛰었다. 점점 그녀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그녀는 바닷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었다. 곧 그녀의 어깨까지 물에 잠겼다. 그가 그녀의 신발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그녀는 물속으로 사라진 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물속으로 달렸다. 그리고 첨벙 소리를 내며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보였다. 수많은 거품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그쪽으로 헤엄쳤다. 마침내 그는 그녀 안고 물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저항했다. 그는 그럴수록 더 힘을 다해 그녀를 끌어냈고 결국에는 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이거 놔!” 그녀는 이성을 잃고 울부짖었다. 그는 그녀의 신발이 있는 곳까지 그녀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물을 토해냈고 호흡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모래사장에 주저앉아서 거칠게 울었다. 곧 물살이 잦아들었고 그녀의 소리는 잔잔한 흐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잡자 그녀는 그를 밑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강제로 앉혀졌다. 그녀는 그에게 푹 안겼고 그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를 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황홀감을 느끼기보다는 그녀의 입술이 매우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그녀가 그를 밀쳤다. 그리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지석은 마음이 찢길 듯이 아려왔다.
10
“야!! 박혜미”
멀리서 광분의 휩싸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가녀린 손끝으로 지석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의 실루엣이 점차 드러났다.
“여기서 뭐해! 계속 기다렸잖아. 옆에는 누구야?” 화가 가득 차 보이는 그 남자와 지석이 눈을 마주쳤다.
“지석이야?” 그는 잠깐 놀라더니 금방 미소를 보였다.
지석은 당황했다. 곧 그가 얼마 전 지석을 해변으로 안내해주었던 그 친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백원이야.”
지석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난 그때 네가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어.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진짜 반갑다. 친구야.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잖아.” 그는 마치 지석과 평생 동안 우정을 쌓아온 친구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미쳤어? 옷은 왜 젖어있어? 이 늦은 시간에 바다수영이라도 한 거야?”
그는 지석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다그쳤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지석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애초에 그녀가 아닌 저 남자가 물속에서 사라졌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가 저런 녀석과 함께라는 사실을 지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개입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없었다.
백원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고 떠나려 했다.
“지석아. 내일 우리 집에 놀러 와. 저녁 대접할게. 친구가 여행 왔는데 아직 같이 밥 한 끼 못 먹었네. 내 아내가 요리를 잘해.”
다시 해맑아진 표정으로 백원이 지석에게 집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지석은 무력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만큼 중력이 힘이 그에게 강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더 한 굴욕도 참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곧 그들이 떠났다. 그녀와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거라던 그의 희망은 박살 났다. 그는 모래 한 줌을 집어서 바다에 던졌다. 흩날리던 모래 가루가 그의 얼굴에 튀었고 그의 턱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 밑으로 뜨거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석은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