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헌 Sep 16. 2023

열대야 없는 고원도시 태백

꿈에 그리던 태백 # 황지 연못을 가다!

모처럼 밤잠을 설쳤다.

나이가 들어도 잠은 잘 자는 편인데

제법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태백시로

떠난다는 마음 설레고도


먼 길을  딸들 가족과

어린 손녀까지 함께하는 여행이라

다소 염려도 되어 이래저래

밤잠을 설친 것 같다.


평소 교대 운전을 잘해 주던

막내 셋째 딸이 임신 초기라

교대 운전 없이 남쪽에 한 도시에서

중앙고속도로 안동휴게소까지 달려왔다


"아빠 안 피곤해요?"

딸이 아빠가 걱정돼서 물었다.

나도 이상하다! 운전에 피곤하지 않다.

간밤에 잠도 좀 설쳤는데...


안동 휴게소에서 다른 시에서

출발한 둘째 딸 가족들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을 했다.


진짜 신기할 정도이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면

식후에 운전으로 졸음이 올 만도 한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이 또랑또랑하다.


태백시청 홈피


내가 꿈속에서 가곤 하는 태백

태백은

내가 10대 후반까지 살았던 곳이다.

나의 유년기와 청년초기의 기억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지역이다.


마음이 고단할 때에 나는 꿈에

 마을로 여행을 떠나곤 했던 태백시에

지금 실제로 찾아 떠나고 있다.


영주시를 지나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하자

벌써부터 느낌이 다르다.


한적한 도로, 눈앞 저 멀리,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병풍처럼 

끝없이 펼쳐진 짓 푸른 산맥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나무들의 색상과 자태도 다르다.

하늘을 향해 곧게 쳐든 소나무 가지들

푸르름이 기상과 기품까지 느끼게 한다.


“어쩜 소나무들이 이렇게 다를까?”

부산에서 자란 집사람은

남쪽지방과 다른 소나무들의 모습에

갈 때마다 신기해한다.  



태백시에 도착

예상 보다

빠르게 태백시에 도착했다.


도로 사정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큰 산을 넘어야 했던 고개 길들을

터널로 쭉 뻗은 직선도로를 내서

길이 엄청 단축이 된 것이다.


저녁 먹을 시간이 제법 남아

예약한 숙소 리조트로 안 가고

우리 가족은 황지연못을

첫 번째 투어 코스로 정했다.


“아빠! 이곳은 왜 이렇게 시원하지요!”

“아! 이래서 사람들이 태백! 태백!

하는가 보군요!” 딸과 사위도 태백시

다른 공기와 시원한 느낌을 말했다.


나는 사뭇 자랑스럽듯이...


“그래, 태백시는

우리나라 남한 최고의 고원도시야!

평지가 해발 700M이 넘는 곳이고,

해발 1500M 넘는 태백산과 함백산

사이에 있는 도시 평균고도가 900M가

넘는 엄청 높은 곳이야!


그러니 다른 곳 하고

다르게 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해가 지면 살짝 추울 수도 있다."


남쪽에서 무더위에 시달리던 가족들은

태백시의 낮은 기온에 마냥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태백시 중심지 황지연못

황지연못은 태백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는 특이한 연못이다.


황지시내 한복판에서

엄청난 물이 솟아나 연못을 이루고

그 물이 흘러 개울을 이루며

흘러 내려가는 신기한 곳이다.


황지연못의 전설

황지연못은

본래 황 부자집터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시주 온 스님에게

황부자의 못된 행실로

하늘의 저주를 받아 집터가 내려앉아

연못이 되었다는 스토리가 있다.


그 집의 착한 며느리는

스님의 요청에 따라 뒤를 따르다가

집터가 내려앉는 거대한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돌기둥이 되었다고 한다.


성경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시에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것과

유사성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황지연못은 태백시 중심에

도심 속의 멋진 공원이 되었다.

물길 따라 자리한 예쁜 카페들은

운치와 낭만을 더하고 있다.


우리 가족들은

도심 속에 운치 있게 잘 꾸며진

황지연못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황지연못은

주변에 맛집들도 걸어갈 수

있어서 더욱 좋은 곳이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태백의 유명한

물닭갈비를 먹었는데

가족들 모두 만족했다.



황지연못에 담긴 나의 추억

황지연못을 나의 50년 전의

기억들과 오버랩시켜 보고 있다.


황지연못은

"황지의 맑은 연못 낙동강 상류 되고..."

시작하는  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가에도

나오고  등하교 길의

추억들이 담겨 있는 곳이다.


10리가 넘는 하교 길

버스비로 학교 부근에서

작게 튀긴 튀밥 한 봉지를 사서

교복 주머니에 넣고 고소한 맛의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 걸어가다 들리곤

했던 곳이 황지연못이다.


당시는 연못 주위에

지금처럼 조성된 돌담이나

보호 나무울타리도 없어서

나는 연못 아래 물가에 내려가

물속을 직접 내려 볼 수 있었다.


당시 연못의 상단 부 쪽에

바로 물 옆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을

내려다보면 무서울 정도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색

그 물속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이리저리 넘어져 있었고

그 사이들로 물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을 직접 보며

두려움 같은 것도 살짝 느꼈었다.



황지 연못과 잊지 못할 기억

황지연못 바로 옆에

내가 잊지 못할 한 곳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쯤

아버지께서 다급히 나를 깨웠다.

겨울 새벽 2~3시경이었다.


눈을 떠보니 아버지는

축 늘어진 어머니를 안

“네 엄마가 다 죽게 되었다!

빨리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와라!”

엄마가 밤에 연탄불을 갈다가

그만 연탄가스를 마시고 쓰러진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일어나

옷만 걸치고 양발도 신을 틈도 없이

후다닥 뛰쳐나가 병원들이 있는

황지읍내 쪽으로 무작정 내 달렸다.


당시는

차가 다니는 도로에도 가로등이 없었다.

나는 캄캄한 밤 길을 급하게 뛰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포장도 안 된 도로는

낮에 왔던 눈이 차바퀴에 다져지고

꽁꽁 얼어 전체가 두터운 빙판이 된 상태였다.  


일어나 벗겨 나간 고무 신발을

찾으려고 손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한 짝 밖에 없어 급한 마음에

한 짝만 신고 맨발인 상태로 또 딜렸다.


첫 번째 병원 문을 두드리며

"선생님! 살려주세요!

우리 엄마가 죽어 가고 있어요!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계속 외치자 잠결에 나오신

여성 한 분이 창문만 열고는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어 갈 수가 없어!

라고하며 창문을 닫았다.  


절망적인 말을 듣고

다시 달려가 두 번째 병원에 가서

외쳤지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잊지 못할 그 이름

나는 세 번째 병원으로

달려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 병원이 마지막 병원이다.


더 이상 내려가면

병원이 없고 우리 마을과 같이

황지의 반대편 외곽지역이다.


이 병원에서도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지 못하면

'우리 엄마는 죽는다!'

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절박해졌다.

의사 선생님을 더욱 애타게 찾아 불렀다,


놀랍게도 입구 불이 켜지고

병원의 현관문이 열리고

간호사 같은 분이 나와서

애절하게 서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엄마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다 죽어가고 있어요.

선생님이 안 가시면 우리 엄마는 죽어요.

제발 우리 엄마를 살려 주세요!”


"너희 집이 어디냐?"

그분이 나에게 물었다.


한쪽 신발도 안 신고

맨 발로 눈길을 달려온 내 모습이

가여워서인지 왕진을 오시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우리 집이 멀다고 하면

못 오신다 할 것 같았다.

“멀지 않아요. 여기서 가까워요.”

거짓말을 둘러 대고 말았다.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은

가시는 길에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을

눈치챘겠지만 화를 내지 않고

제법 먼 길을 끝까지 따라오셨다.


집에 와보니

다행히 어머니가 의식은

살짝 돌아왔으나 여전히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의사 선생님의 진찰과 함께

주사를 놓고 병원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시일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회복되어 살아나셨다.



 <서울병원>

그 병원의 이름이다.

황지연못 바로 앞쪽 삼거리

오른쪽 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서울병원이 없다.

건물들도 새로 건축이 되어

이제는 그위치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서울병원의 입구 현관 모습과

고무신 한쪽만 신고 애처롭게

서 있는 어린 나의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지금도 남아 있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에 대한 고마운

기억은 5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내 가슴속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하! 이렇게 손주 바보가 되는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