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월과 장미와 영화

사랑

by 별들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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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이어지고 또 이어지더니

결국 흐릿했던 기억을 되살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벽, 넘어갈 수 없는 담벼락 앞에서

깊은 신음과 한숨만이 전부인 날.

바로 그런 날, 게다가 사랑이라니.

새로운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고 느껴온 날들에

불쑥 튀어나와 낡은 사랑마저 무너뜨리다니…


사랑은 무엇이어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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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사가 에어컨을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춥다.

1번 좌석 아주머니가 에어컨을 줄여달라고 요청해도 소용없다.

차가운 공기가 나오는 구멍을 닫아도 서늘하다.

바깥 기온은 35.1도를 가리키는데, 버스 안은 춥다.


밖과 안의 온도차, 부조화 그리고 엇갈린 방향.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지만,

한쪽은 여전히 미래를 꿈꾸고, 다른 쪽은 작별의 말을 준비한다.

한 사람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다른 사람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더 사랑하는 쪽은 늘 조심스럽고, 덜 사랑하는 쪽은 당연한 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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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잠이 들었다가 추워서 눈이 떠졌다.

콧물이 삐질 나더니 줄줄 흐른다.

안 되겠다 싶어 타월을 꺼냈다.

외출할 때 늘 준비하는 스포츠 타월로 몸을 덮었다.

타월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일요일이라 터미널이 부산하다.

‘귀멸의 칼날’ 팝업 스토어도 있다.

박스 오피스 1위를 달리는 영화답게

입장하는 줄도, 구입하는 물건을 들고 계산하는 줄도 길다.

‘어떤 영화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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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장미 한 다발 사들고 찾아갈까?

지하철 역으로 들어서는 에스컬레이트 앞.

꽃가게 앞에 놓인 빨갛고 하얀 장미가 탐스럽다.

바구니에 꽂힌 메모지에 나르샤 장미,

꽃말은 사랑과 아름다움, 가격 3만 원이라고 적혀 있다.

3만 원이면 그에게 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다시 우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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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월과 장미와 영화,

예전의 나라면 장미와 영화를 골랐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을 고백하고, 함께 있고, 공감하고, 더 사랑한다 말했을 것이다.

사랑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사랑과 아름다움이 기쁨이고 아픔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

뽀송한 타월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나를 지키고 상대도 배려할 만큼 훌쩍 커버린 걸까.

젊음과 낭만 대신 추억과 현실로 삶의 장면이 바뀐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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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


‘그’를 따뜻하게 감싸 줄 타월이 필요할까.

내가 조금 더 다가서는 장미가 필요할까.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영화가 필요할까.


내 마음의 온도부터 살펴야겠다.

내 체온이 너무 낮아져 있나?

너무 뜨겁게 달궈져 상대가 더 도망가고 있는 건 아닌가?


사랑의 온도차가 느껴지면, 정직하자.


‘더 따뜻해지는 용기’를 발휘해야 할지,

‘내 온도를 지키며 물러서는 지혜’가 필요한지,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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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이들과 점심 식사를 한다.

약속 장소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

그곳에 이르는 동안 ‘사랑’을,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사랑은 무엇이어야 했는가.


사랑은 ─

타월을 꺼내 조용히 덮어주는 마음,

장미의 가시에 다치지 않도록 손을 이끄는 배려,

다른 장면을 보고도 함께 극장을 나서는 의지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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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해야 할 사랑은 ─

더 이상 어떤 한 사람의 손을 잡고 거니는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은 이제,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 아니라,

누군가의 내일을 지켜주는 약속이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해야만,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으므로.


사랑해야겠다.

타월을 꺼내 조용히 덮어주고,

장미 가시에 다치지 않도록 이끌고,

함께 극장을 나서야겠다.


20250824_192210.jpg 차창 밖. 19시 22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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