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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Sep 07. 2023

예의 없는 것들

워싱턴 DC에서 한국을 생각하다

십여 년 전 미국 유학길에 오른 K 선배는 양복을 갖춰 입고 비행기에 탔다. 남의 나라에 처음 가는 길이니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 얘기를 듣고 구한말 독립투사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지 몰라 명예로운 모습으로 남도록 늘 양복 차림으로 다녔다는 해외 독립운동가처럼 비장한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미국 유학 기간 내내 방에 태극기를 걸고 지냈다는 C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였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속된 말로 ‘깔깔이’라고 하는 군용 방한복과 군화도 챙겼다. 학교가 겨울이 긴 지역에 있어서 눈 치울 때 아주 유용하게 썼다고 한다. 예의와 전투력을 갖추고 유학 생활을 잘 마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도 C 교수처럼 “라떼는 말이야"하면서 학생들에게 유학길에 갖춰야 할 예의에 관해 설파하고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워싱턴 DC 행 비행기에 타면서 K 선배를 생각했다. 선배라면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 수도에 한 번은 가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곳에 가봤을까 문득 궁금했다. 나는 미국에 온 지 20년 가까이 되었고, 그사이 세 개의 주를 거쳤다. 그동안 살았던 주의 주도에는 가봤고, 여러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워싱턴 DC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열 살이 된 아이에게 미국 수도를 한 번 보여주자고 남편과 뜻을 모아 3박 4일 여행 일정을 짰다.


첫날에는 백악관 박물관, 워싱턴 기념비, 링컨 기념관,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자연사 박물관을 부지런히 둘러봤다. 도시 한복판 평지에 있는 백악관을 보고는 산을 등지고 있는 청와대가 더 운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한참을 걸어 포레스트 검프가 제니를 만났던 링컨 기념관 앞의 리플렉팅 풀(Reflecting Pool)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옆길로 이어진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에 갔다. 그곳에 적혀있던 “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그리고 그 이전에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 덕분에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들의 고결한 삶을 기리며 잠시 묵념했다.


다음 날에는 미국 국회의사당과 미국 의회도서관에 갔다. 국회의사당 관람 전에 보여준 홍보영상은 미국 건국의 역사를 요약한 내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들리는 언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유럽에서 온 듯한 여행객이 많았다. 그들의 조상이 건너와 개척한 땅을 구경하러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 터널을 통해 연결된 의회도서관은 건물 내부가 미술 작품같이 아름답고 화려했다. 미국 건국 초기에 지어진 건물인데도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세계 최대규모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이라니 일생을 바쳐도 다 읽지 못할 책들이 우주의 별 같이 그려졌고 일순간 내가 티끌같이 미미한 존재로 느껴졌다. 그곳에서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보았다. 그보다 먼저 우리나라가 금속활자 인쇄술로 만든 직지를 떠올렸다.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 가 있는 직지를 생각하니 서글펐다.


마지막 날에는 국립 미술관,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 성서 박물관을 관람했다. 미술관에서 렘브란트, 루벤스, 고갱, 고흐, 마네, 르누아르, 세잔, 로댕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그들은 생전에 그들의 작품이 미국 박물관에 전시될 거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항공 우주 박물관에서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 플라이어(Flyer)를 보았다. 그들이 하늘을 날던 20세기 초의 대한제국은 전쟁통이었다. 이렇듯 나는 사흘간 둘러본 모든 곳에서 한국을 떠올렸다. 워싱턴 DC를 구경하러 간 건지, 한국을 생각하러 간 건지 헛갈릴 만큼. 외국에 나가 살면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미국 수도를 관광하면서 애국심이 더 투철해진 것 같다.


우리 세 가족은 구경한 곳 중 가장 좋았던 곳,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이야기해 봤다. 각자 취향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나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공대 출신인 남편은 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을, 곤충을 좋아하는 아이는 자연사 박물관을 가장 좋았던 곳으로 꼽았다. 아이는 많이 걸어서 힘들다며 내내 투덜댔고, 나와 남편이 더 신났던 여행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며 미국 수도에 눈도장을 찍었으니 이제 좀 예의를 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 유독 예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부터다. 2년 전 대한민국은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 왔다. 홍 장군의 유해를 모신 군 수송기가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했을 때 공군이 보유한 모든 전투기를 띄워 호위해 최고의 예우를 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유해 봉환을 원하지 않았지만,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홍 장군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모셔 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홍 장군은 작금의 사태를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 이런 수모를 당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예의 없는 것들아, 나는 고려인 후손들에게 돌아가련다. 토착 왜구가 판치는 대한민국은 해방 조국이 아니다.”하고 호통치지 않으셨을까.


최고의 예우를 갖춰 모셔 온 영웅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은가.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말이다.


Korean War Veterans Memorial in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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