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마무리하며.
이 책에 나오는 여러 형태의 슬픔을 따라가며, 저자가 말하는 그 슬픔들이
지금은 슬픔이 아니라고 느껴지더라도,
결국 슬픔이 되어야만 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가끔은 분명 문제로 삼아야 하고, 깊게 사유해야 함에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순간들이 있다.
그건 ㅡ 귀찮음과, 회피 혹은 무책임함이 깔려 있는 건데,
나는 그 순간들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 그게 최선이었나 하는 의문을 몇 번이고 생각해야 했다.
그 무책임은,
길게는 몇 년씩 나를 괴롭히는 치통같이 느껴진다. 안 아프다가 한 번씩 아파지는.
현실에선 치과라도 있지만, 내 마음속엔 뚜렷한 병원이 없다.
그럴 땐 그 고통을 조용히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그 무책임을 덮을 만큼
조금 더 나은 일을 만들어가는 것.
책엔 슬픔이라고 명명하지만,
슬픔을 빗댄 다른 감정들이 많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건 슬픔을 공부하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공부하는 슬픔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슬픔의 구조 안에 있다.
자조적이든, 자기 파괴적이든, 약간의 우울이든— 결국 그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슬픔이라는 시선으로 생각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마음보다 더 큰마음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의 마음만 들여다보다 보면
타인의 마음을 작게 볼 수밖에 없다.
항상 자신의 마음이 더 슬프다고 믿기에.
추석이라 조카가 놀러 왔다.
이제 막 한 살이 지난 조카를 부모님과 누나, 매형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인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짧은 순간이지만 슬픔을 떠올렸다.
그들이 다정하게 웃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실과 고통을 겪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별을 지나왔을까.
슬픔을 이해한다는 건,
삶에 얼마나 많은 슬픔을 내어주었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내어준 사람만이,
조금이라도 그 감정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은 자연스레
사람이 왜 아이를 낳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그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형태를 느낄 때가 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감정의 결을,
삶 속에서 배워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할 때,
눈빛이 반짝이고 웃음이 자연스럽게 번진다. 아마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게 아닐까.
문득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내 마음에 대해, 그리고 저자의 마음에 대해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왜 저자가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이자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는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