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9월 15일 생장 출발 론세스바예스 도착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할 때였다. 드넓은 잔디밭에 털썩 앉아 쉬고 있는데, 등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듣기 평가를 하는 마음으로 무슨 얘기를 하나 귀를 쫑긋 세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 속에서 ‘코리아 쏼라쏼라 코리아’ 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이 길에 한국인이 참 많다는 얘기였다. 어떤 서양인 남성이 한국에서 TV쇼에 이 길이 나왔다는 얘기를 했다. 오~ 많이 아는데. 그쯤에서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한참 이어가던 남성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나에게 ‘너도 한국인이야?’라고 물었고 나는 ‘응 한국인이야’라고 했다. 이 길에 왜 한국인이 많은지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지 생각할 새도 없이, 한 서양인 할머니가 덥석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한국인이라고?! 나 한국 좋아해. 이승기 팬이야’ 대박. 이승기 팬이라는 미국인 할머니는 나를 너무너무 반겼다. ‘누난 내 여자라니까’라고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하니 아이처럼 꺄르르 좋아했다. 여기서 한류를 체감할 줄이야. 이승기 덕분에 다 같이 하하하 웃으며 우리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런데 점점 날씨가 이상했다. 산이 높아지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왜냐하면 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날씨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할 법했는데, 나는 이미 걷는데 지쳐서, 아니 등산에 지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나폴레옹 욕뿐이었다. 나폴레옹은 왜 굳이 이 산을 넘어서 피레네에 나폴레옹길을 만든 거야, 산을 좀 돌아서 편히 가던가, 이게 뭐야...툴툴툴. 전쟁 중에 침략하기 위해 가던 길이니 눈에 띄지 않을 험한 길로 가야 하는 게 맞는 건데, 나는 그마저도 못마땅하고 다 힘들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투정이 아닌, 입에서만 툴툴 거리는 투정이었다. 나는 그 힘듦마저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