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9월 15일 생장 출발 론세스바예스 도착
푹 잤다. 다행히도 나는 잠을 잘 잔다. 어디서든. 유일하게 못 자는 것이 있다면 ‘낮잠’이다. 낮에 쪽잠보다는 밤에 통잠을 자는 좋은 타고남 덕분에, 잠자리를 가리지 않아서 긴 여행 버틸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았고, 나는 배낭을 미리 얘기해 둔 숙소 로비에 두고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동키여서 과연 배낭이 올까, 염려도 되었지만 그때 마음은 ‘에라 모르겠다’였다. 모든 것은 시작되었고 되돌릴 수 없다. 일단 가야 하는 길에 나는 들어섰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이어질 문장에서 피식 웃고야 말 것이다. 나는 아침 7시 30분에 출발했다. 게다가 나는 그것도 엄청 일찍 출발하는 건 줄 알았다. 피레네를 넘으면서 한국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 새벽 5시 30분 전후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디서 무슨 정보를 본 것인지... 여튼 늦은 시작이었지만 그때는 몰랐고, 그저 내가 서둘러 길을 나섰다는 뿌듯함에 오히려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지만 날씨 예보이는 비 소식이 없었던 터였다. 길은 잘 닦여 있었고 마치 관악산 초입 아스팔트 길을 오르듯 나는 피레네를 올랐다.
걷다가 한 동양인 여성을 만났다. 그때 나는 자각이 좀 없어서, 다짜고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 역시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서 당연히 한국인이구나 싶어서 종알종알 대화를 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아뿔싸, 알고 보니 그녀는 대만 사람이었고 한국말을 잘하는 것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사과를 거듭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그녀는 걸음이 나보다 조금 더 느린 편이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헤어졌다. 다시 길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걷다 쉬다를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반복하며 올랐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고맙게도 카톡이 종종 울렸다. 생일 축하 메시지로. 그래서 오르는 길은 가볍고 신났다. 구름이 계속 많긴 했지만 마음은 가볍고 기분도 좋았다. 중간에 오리손 산장에서는 집 떠나온 후 처음으로 가족 단톡방에 내 사진을 전송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쉬고 있을 때 한국인 여성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벌써 많이 지쳐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다르지 않은 차림이었다. 새 배낭, 새 등산화. 그녀는 배낭까지 메고 피레네에 온 것이다. 대화를 나누고 보니 나보다 더 정보 없이 온 이였다. 그녀 역시도 오랜만에 한국인과 대화를 나눈다며 반가워했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고, 그녀는 산장에서 더 쉬다 가겠다고 했다. 도착지는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닌지 그 후로 만나지 못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