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실한 미션수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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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실한 미션수행자였다.
보일러가 터져 반지하 방의 난방이 끊겼다. 수리공을 불렀지만, 이런저런 얘길하며 내일 온다고 한다. 영상의 기온을 되찾은 포근한 겨울 날씨라지만, 반지하 방은 춥다. 아무 것도 쓰지 못한 빈 워드 화면을 보고 있다. 커서는 깜빡이고 등줄기로 냉기가 지나간다. 하루만 집에 가서 잘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어서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전기장판을 사 올까 싶었지만, 벌이가 없는 상황을 생각하니 하루만 버티자 싶다. 가까운 찜질방을 찾아봐야겠다. 내일 보일러 수리하면 나아지겠지.
수리공은 금세 보일러를 고쳤다. 오래된 보일러라 이제는 부품 찾기도 힘들거라며, 집주인에게 얘기해 바꾸라는 말을 남겼다. 얼마 못 버틸거라는 말도 함께. 나도 얼마 못 버틸까 싶었다. ‘그늘에 부는 바람’으로 갔다. 오래된 보일러는 텅 빈 방을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다.
며칠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며칠 커피양에게 연락도 끊었다. 빈 워드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쌓일수록, 허울만 살아있는 이 곳이 싫어졌다. 여기서만큼은 ‘작가님’이 되어 무언가 갖춘 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서조차 텅 빈 공허함이 느껴진다. 시키는대로 돈만 벌던 민수와 직접 쓴 문장 한 줄 없는 작가님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기인형과 다를 바 없는 존재에 팽팽한 공허함만 느껴진다.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고, 커피양은 반갑다는 듯 동그란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적당히 손을 들어 웃어주고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다. 앞선 손님들의 음료를 내고, 커피양은 늘 마시던 커피와 시나몬롤을 한 접시 갖다주었다. 오늘은 커피양에게 농담 한 마디 건네고 싶은 마음이 없다. 커피양이 맞은 편에 앉았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쁠 때일수록 여유를 잃지 마세요. 작가님 글 보고싶어요오~”
“커피양, 내 글 보고싶어?”
“그럼요. 작가님 글은 거침없을 것 같아요.”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해? 나랑 카페에서 잡담한 거 말곤 모르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맞아요, 저는 작가님을 잘 몰라요. 잘 모르지만 작가가 되고 싶으신 것 같아서 응원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저도 카페에서 일하지만 언젠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을 거고. 그때 날 잘 알든 모르든, 누군가 응원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작가님 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만나는 손님들에게 응원이 되어주고 싶을 뿐이예요.”
“응원도 너의 욕망이었네.”
“그렇게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작가님 응원해요. 좋은 글 쓰실 거예요.”
커피양은 생긋 웃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너무 가벼워 그 순간 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순간의 진심은 순간에만 존재할 뿐이다. 커피는 쓰고 시나몬롤은 씁쓸했다.
휴지통 마저 비워버려 며칠 간 쓰다 버린 글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과물이 없는 시간은, 그 시간조차 사라진다. 형은 그 몇 년의 시간에서 어떤 결과물을 얻게 될까. 엄마는 나에게 얼만큼의 시간을 주었을까. 윤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어디에 버렸을까? 빈 워드 화면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한 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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