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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Oct 05. 2023

명절 준비에 대한 끄적임



"내년부터 네가 맡아라."

"네?"

"이제 나도 힘들다. 네가 해라."

"..."


작년 추석에 있었던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대화다.

그렇게 어머님 댁에 있던 제기와 병품이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일 년에 딱 세 번이다. 구정, 추석, 제사.

세 번 밖에 안되는데 뭐 어때. 까짓것 하면 되지.라고 말해봐도 마음의 부담이 사라지진 않더랬다.





우리 집에서의 첫 명절. 구정 때는, 그야말로 대환장 파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자영업을 하는 남편 덕에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음식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을 동시에 볼 수 있을지, 무엇부터 만들어야 할지, 집안 청소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등과 같은 수많은 물음들이 붙어 들었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일은 하는 못난 습성(이때는 이런 내 성격이 정말 싫었다)을 배운 탓에 어찌어찌 준비를 했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첫 명절을 치렀다.

그리고, 내게 남은 건 약 한 박스를 종일 들이부어도 쉬이 가시지 않는 두통뿐이었다.  



어느덧 다시 온 명절. 추석.

구정의 악몽 아닌 악몽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전야제를 시작한 것이다. 두통은 물론 어깨와 허리의 근육통까지 동반되었다.

안 되겠다 싶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그때 나 약 먹는 거 보지 않았냐고, 당신도 일하느라 힘들었겠지만, 나는 약에 의존해야 할 정도였다고. 이번에는 가능한 다 사서 할 거라고 선언했다.  


나 스스로에게도 말했다. 이래 봬도 올 한 해동안 감사일기 매일 쓴 사람이다. 긍정 회로를 돌려보자.라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음.. 이 김에 대청소하는 거야. 온 집안을 다 하는 것도 아닌데, 보이는 거실하고 화장실만 하자. 이번엔 나물, 전은 사기로 했으니 좀 더 나을 거야. 익숙한 부엌에서 하니 훨씬 편할 거야. 그럼 그럼. 괜찮아'



두 배는 나았다.

나물과 전은 집 앞 시장 사장님의 실력을 빌렸다. (명절 전날 교통경찰이 배치될 정도로 큰 규모의 유명한 지하 시장이다). 소고기를 물에 우려내는 대신 한우 육수를 활용했다. 식사 때 내놓을 추가 메뉴 한 가지는 팩에 담긴 양념 돼지갈비로 마련했다. 대추, 밤, 황태포, 과일 등의 구입할 것들은 온라인 마트의 편리함을 누렸다.

남편이 하루는 집에 있을 수 있었기에, 거실 청소기, 결레질, 화장실 청소를 맡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있을 땐, 한 시간 정도는 앉아서 쉴 수 있었다.


명절 당일.

식탁 앞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어머님이 한 마디 하신다.


'아니, 시금치가 없어서 취나물을 샀어? 초록색 맞추려고 한 거면 오이나물을 만들었어야지. 전 한 번 먹어보자. 흐음.'


소고기 뭇국이 진하고 맛있다는 아버님 말씀에, 어머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흐음. 소리를 한 번 더 내셨다.

만들지 않고 산 것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으셨던 것으로 보였다.

혼자 집에서 다 하기 힘들어서 좀 사서 했다고, 그래도 이렇게 상 차린 것, 신경 쓴 것은 보이지 않으시냐고, 수고했다고 말 한마디 하실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다 이내 삼켜버렸다. 까끌까끌한 밥알들과 함께.


오후 세시.

식구들이 각자의 집으로 출발한 뒤, 두통이 시작되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구비해 둔 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으며 한숨을 푹 쉬어냈다. 이 숨과 함께 그 정신적 압박이 날아가 버리기를 바랐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 엄마 집에 가야 한다. 가서 뭐라도 더 도와야 한다.

명절 일주일 전부터 잠도 잘 주무시지 못했다. 수십 년 맏며느리로 명절 때마다 혼자 15인분 가량의 음식과 설거지를 도맡아온 설움이, 힘듦이 미리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혼자 상을 차릴 자신의 딸 걱정까지 더해졌으니 오죽했으랴.


아니나 다를까, 엄마집에 도착하니 몇 년은 더 늙으신 듯한 모습이다. 얼굴은 누렇고 주름살이 더 깊어졌다. 엄마도 자신의 딸 얼굴을 살핀다. 힘들진 않은지 보는 것이다. 일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 사서 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허허허 웃어대며 말이다.


그렇게 엄마 옆에 붙어 쫑알쫑알 수다를 떨고 나니 엄마 얼굴에 혈색이 돈다. 내가 오니 기분이 좀 나아진다고도 말씀하신다. 다행이다. 음식은 함께 준비하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어 드려서.

문득 엄마와 딸이 누군가들의 며느리가 되어 수고했다고 서로 토닥이는 이 상황이 웃기고 슬퍼졌다.






명절 준비가 조금씩 간소화되고 있긴 하다. 예전만큼 많은 식구들이 오는 것도 아니다. 남자들도 준비를 함께 하기도 한다. 그래도 며느리는 여전히 힘들다. 몸의 힘겨운 만큼이나 마음의 어려움도 있다. 힘의 크기가 너무 커서 조상에게 감사함을 오롯이 전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래본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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