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 2초, 3초.. 정지화면 아니다. 두 눈은 껌뻑이고 있었으니. 그리고 동공은 양 옆으로 떨리고 있었으니.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조차 저 멀리 사라졌다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 블라블라.. 쌍둥이는 임신 중에 힘들기도 하고, 산모와 아기 모두 조심해야... '
요약하면, 다태아 임신은 위험도가 높아 그만큼 더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걱정만 한가득 안고 사는 내게, 의사의 몇 마디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어야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마음속 환희에 찬 소리가 그 걱정들을 아무렇지 않게 휘리릭 덮어버렸다.
'우리에게 아기가, 그것도 둘이 함께 찾아왔어. 그토록 바라고 소망하던 아가들이.
잘 키워낼 거야. 잘할 수 있을 거야. 만나서 반가워, 우리 아가들'
그 기쁨도 잠시, 짐작조차 하지 못한 증상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아기를 만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정확히는 4주가 되는 시점이었다.
입덧이 있다던데 왜 나는 아무렇지도 않지? 먹덧, 토덧 뭐 그런 게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먹덧인가?
별거 아니네.라고 말하는 순간, 꼬수웠던 밥냄새가 느닷없이 느끼한 기름처럼 훅 다가왔다. 그러니까, 물 위에 동동 뜬 기름만 숟가락으로 떠서 내 입 앞에 들이민 것 만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물과 사탕, 과자로만 연명한 6개월 간의 입덧.
갓 지은 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의 물방울 입자 하나가 하늘하늘 날아와 콧속으로 훅 들어오면 렛츠 스타트다. 냉장고 안의, 반찬통 안의, 배추김치 잎에 묻은 고춧가루 한 알의 냄새가 난다. 어떤 집에서 무언가 굽는 기름 입자들이 창문을 타고 올라온다. 정답. 이건 분명히 갈치. 남편 가방 안에 먹다 남은 단팥빵 봉투가 뜯어져 있는 걸까. 누릿한 빵냄새가 지독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초능력인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콧구멍은 지맘대로 벌름 버리고 후각 세포들이 팡팡 터진다. 참으로 별스럽다.
남편의 실내 캠핑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작은 부엌 옆의 한 평 남짓한 베란다 생활.
별것 아닌 냄새에 우웩 거리며 화장실과 절친이 된 와이프를 본 그는 어느 날 새벽 조용히 그의 거처를 옮겼다. 밥솥과 가스버너, 그리고 냄비.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 내려놓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각을 잡으면 뭣하랴. 재활용 쓰레기와 함께 하는 차디찬 바닥인걸. 끄응.
퇴근 후 기진맥진하여 침대에 누워있던 어느 날이었다.
저 멀리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난다. 패딩과 수면양말, 귀마개로 중무장한 그가 라면 두 봉지를 품에 껴안고 경건하게 그만의 캠핑장 문을 연다. 버너에 불을 켜고 물이 담긴 냄비를 조용히 올려놓는다. 택배 박스 윗부분을 지지직 떼어내어 깔고 앉더니 무릎을 가만히 끌어당겨 앉는다.
그러더니 가스버너에서 소박하게 올라오는 푸르고 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 시작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깊은 산속에서 멋들어진 텐트 옆, 캠핑 의자에 앉아 타닥타닥 타고 있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자신을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보글보글. 물이 끓기 시작한다. 5분여의 숲 속 불멍 체험이 끝났다.
갑자기 스르륵 바깥으로 나오더니, 주변을 살피며 냉장고 앞으로 살금살금 향한다. 냉장고 문을 앞두고 대결을 준비하듯 자세를 잡는다. 그러고는, 마치 챔피언 복싱 대회에서 상대방에게 킥을 날리듯 빠르게 치고 빠진다. 그의 손에 들린 건 김치.
라면 수프를 세상 소중하게 뜯어 물 위에 균등하게 뿌린다. 두 번째 건더기 수프, 세 번째 라면 투하.
잠시 후 후루룩 소리가 들린다. 적당한 면과 김치, 국물까지 두 볼이 터져라 한가득 넣고 야무지게 씹어대는 그의 입이 그 어느 때보다 발랄하다. 비로소 그는 라면과 물아일체가 된 것이다.
그 순간 차디찬 바닥에 택배 박스를 깔고 앉아 있는 베란다가 별빛이 반짝이는 숲 속 캠핑장으로 보였던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내가 입덧을 시작한 이후 본인도 입맛이 없다고 하던 그였다. 내가 먹지 못하는 건 자기도 같이 입에 대지 않겠다고 두 손 꼭 잡으며 말했던 그였다. 본인도 입덧을 하는 것 같다고 한 번씩 욱욱 거리던 그였다. 그가 말하던 입덧이라는 것은 라면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아마도 사랑으로 감싸진 생각이 몸을 지배했었으나, 라면의 깊은 MSG와 함께 하는 면치기의 기억이 그의 입을 일깨운 것이 아니었을까.
잠시 괘씸함과 귀여움이 스쳤다. 그러다 금세,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랑"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이건 사랑이다.
물론, 지금 잠시 일탈했지만, 나를 위해 식욕까지 스스로 부정해 왔던 이건, 분명 사랑이다.
부모님 외에 나를 이토록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지금 저기 찬바닥에서 면치기를 하고 있는 저 남자. 한 명뿐이다. 고맙다.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