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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Feb 24. 2023

디스크 환자, 1번 레인의 물개로 다시 태어나다.

미생은 아름다워

어랏? 허리가 시큰거린다. 발가락만 까닥해도 다리 전체가 찌릿거린다.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이다.

뭐지?



나를 받아준 회사에 충성을 다하며 매일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린 지, 5년 째였다.

1년 전 부서를 옮겨 무리하게 앉아 있던 탓이었을까. 멋져 보이겠다고 새로 산 7센티 샌들을 신고 매일아침 뛰어서일까. 디스크라는 반갑지 않은 녀석이 허리로 찾아왔다. 젠장.


나름 동네에서 유명한 정형외과에 들렀다. X-ray를 찍자 하더니, 침대에 눕혀 무릎을 끝을 구부렸다 폈다 한다. 다리가 당기냐고 물어본다. 아니 이봐요. 허리부터 발끝까지 하체가 모두 후끈거려 환장하겠는데 다리 당기는 것까지 어떻게 느끼냐고요.

진단 결과, 디스크는 아니란다. 진통제와 염증완화제를 처방해 줄 테니 먹어보고 그래도 안 좋으면 다시 오란다.


하지만,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회사에서 30분도 채 앉아 있기 힘들었다. 그나마 서 있으면 적어도 다리까지 찌릿거리지는 않기에 캐비닛 위 노트북을 올려두고 서서 일을 쳐냈다. 일 욕심은 많아가지고. 미련하게 일을 해댄 2주 동안 디스크는 삐직삐직 신나게 삐져나와 신경을 미묘하게 눌러댔다.



다른 병원에 들러 MRI를 찍었다. 그리고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


'2개월간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입원이 제일 좋고요. 지금 이 상태에서 앉아있거나 서있으면 하체를 움직이기 힘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입원? 그것도 2개월? 에이. 설마.


다른 병원도 가봤다. 같은 대답이었다.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아니지? 아니죠?





2주간 휴가를 내기로 했다.

당시 결혼 1년 차였던 나는 나름의 신혼집을 두고, 예전엔 내 방이었던, 지금은 창고방인 곳에서 요양을 시작했다. 물렁 거리는 매트리스에 누우면 허리 가운데가 욱신거렸기에 바닥생활을 해야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엉덩이부터 발끝까지 멍든 부위만 용케 찾아 망치로 슬슬 건드리는 듯한 불쾌함이 5초에 한 번씩 지속되었다. 잠들기 전까지.

무릎 사이에 베개를 끼고 옆으로 누워 두 겹의 요 위에서 생활한 지 일주일. 통증의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매일 세 번 이상 허리에 좋다는 스트레칭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천천히 걷기 운동을 10분, 20분. 30분 점점 늘려갔다. 그러다, 2주가 될 때 즈음 앉아서 밥 먹을 정도까지 되었다.


회사는 다녀야 한다.

지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일에 대한 집착이 참으로 대단했다. 어떻게든 회사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다.

걷기가 효과가 있었으니, 계속해서 운동으로 치료해 보기로 했다. 허리에는 수영이 가장 좋다는 의사의 추천. 엇, 마침. 집 앞에 구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이 오픈한단다. 럭키!




그날부터 매일 아침 6시, 수영장으로 출근했다.


수영이라.

수영복 입고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일곱 살 적 사진만 떠오를 뿐이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 작고 마른 여자아이.

그때도 아마 물에는 안 들어갔다지.


하지만 물에 대한 공포는 허리 디스크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씻은 듯 사라졌다.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다. 내 목표는 치료다. 그래서 회사를 다니고, 일상생활을 되찾는 것이다.


수영복을 입고 빙 둘러 서 스트레칭 후, 초급반 1번 레에서 시작된 수업. 발차기다. 핫둘핫둘.

좋아. 이거야. 디스크 3, 4번 사이의 허리 근육들아 단단해져라. 커져라. 디스크를 다시 안으로 밀어버려라.

헛돌헛둘.




그렇게 두 달, 세 달, 어느덧 6개월.


나는 아직도 1번 레에서 가열하게 발차기를 하고 있다. 헛둘헛둘.


나와 같이 수영을 시작한, 170의 키와 군살 하나 없는 몸매를 소유한 그녀는 어느새 3번 레의 인어공주가 되어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나비처럼 올라와 돌고래처럼 첨벙 물속으로 들어간다. 부. 럽. 다.


그래도 내 수영 진도는 빨랐었다. 두 달 만에 2번 레로 옮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심각하게 튀어나온 디스크 덕에 평영과 접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수영 선생님의 불호령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리 잘해도 나에겐 자유형, 배영 두 가지만 허락된 것이었다.


2번 레이면 그나마 존심은 덜 상하겠지, 하고 신나게 옮겼다. 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3번 레은 평영과 접영 기초반이다. 접영을 하는 인간들이 배영을 하는 내 코에, 내 입에 물을 한 바가지씩 퍼붓는다. 들숨에 물이 들어오는 날엔 뱉어낼 틈도 없이 꿀꺽. 컥컥.


에잇, 가뜩이나 여기 있는 것도 서러운데 이게 뭐람.


선생님에게 부탁해, 1번 레인으로 다시 옮겼다. 어차피 더 이상 배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1년 동안 1번 레에서 자유형과 배영을 수영선수 못지않게 마스터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신규 회원으로 등록한 동네 아주머니들은 레일 끝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다 내게 한 마디씩 하신다.


'아니, 왜 이렇게 수영을 잘해~ 너무 잘해~ 물개 같어~'

'아, 예' (웃음)


속으로 답한다. 저 1년 동안 자유형, 배영만 작살나게 했어요. 하하하.


그리고, 그분들의 부러움의 눈빛을 받으며 실력을 자랑한다.

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으로 뻗고 팔 가장 넓은 원을 그리며 휘두른다. 발은 앙증맞게 물 표면을 쳐대며 앞으로 나아간다.


마치 물개처럼.


그렇다. 비록, 1번 레이었지만, 인어공주도 아니었지만,

실력만은 인정받는, 1번 레의 물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환호와 함께, 수영은 1년간 더 이어졌고, 허리 통증은 씻은 듯 나았다.

그리고, 지금도 수영장에 갈 때면, 몸을 물속에 편안하게 맡긴다. 물방울의 움직임만 들리는 그곳에서 자유로운 유영을 만끽한다.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둥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두 아이를 동시에 들춰 업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40이 된 지금, 일과 육아의 살벌한 생존기를 버텨낼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한다.


생각을 바꿔보자.


회사는 나에게 허리 디스크를 주었다.

하지만 그 덕에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근력뿐 아니라 체력도 다질 수 있었다.

물을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생겼다.


무엇보다 좋은 건,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고맙다. 디스크야.

그런데 다시 만나지는 말자꾸나.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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