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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Mar 25. 2023

시어머님께 5천원을 빌렸습니다

1회용 교통카드는 현금이나 카드로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강남에서의 약속.

그 번화가에 차를 갖고 가는 건 무리일 테고, 버스도, 전철도 두 번씩 갈아타야 한다.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떠올린 생각. 그렇지. 역세권인 시어머님댁에 몰래 주차하고 거기서 전철을 타고 가면 딱이다. 집에서 차로 10분이면 어머님댁이고, 그곳에서 전철을 타면 20분 만에 강남역에 도착한다.

역시 잔머리 하나는 잘 돌아간다. 흐흐. 남편에게 전달받은 비번으로 주차장 진입,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하철로 향했다.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으려는 순간. 아뿔싸.

가방을 바꾸면서 지갑을 놓고 온 것이다. 젠장. 어디로 가야 하지. 1회용 교통카드는 단 한 번도 구입해 본 적이 없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간신히 발급기 찾았다. 그래, 하나하나 해보자.

역을 선택하고, 구간을 클릭하고, 일반으로 구입하려는데. 이런. 결제하는 곳 어디에도 삼성페이의 ㅅ 도 적혀있지 않다. 아. 어쩌란 말인가.

빨간색의 직원 통화 버튼을 눌러본다. 다행히 빨리 받으신다. 상당히 딱딱한 목소리다.


'여기, 삼성페이 결제는 안 되나요?'

'네, 안됩니다. 현금이나 카드만 가능합니다.'

'아, 그런데 지금 현금과 카드가 다 없어서요.'

'그럼, 편의점 옆에 ATM이 있으니, 인출해서 사용하세요'


뚜. 뚜.


편의점 옆 ATM? 가보자. 화면에 종이가 붙어 있네? 뭐지?

아뿔싸. 고장이다. 생전 안 쓰던 욕들이 목구멍 바깥으로 나오겠다고 아우성이다.

자, 나는 차분한 사람이다. 진정하고 생각해 보자. 방법은 세 가지다.


1. 다른 ATM을 찾는다.

2. 남편에게 현금을 갖고 오라고 부탁한다.

3. 주차해 둔 차를 갖고 간다.


일단 다른 ATM을 찾아보자. 다행히 걸어서 5분 거리에 주거래 은행 기기가 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가장 빠른 걸음으로 골목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드디어 찾았다.

자, 나에겐 카드도 통장도 없으니, 무통장 무카드로 예금 출금 선택. 만원. 그래, 됐어. 다됐어.

라고 외치는 순간, 순간 화면 가운데 팝업이 뜬다. 불길하다.


'무통장 무카드 예금출금은 창구에서 신청한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아. 이런. 이런. 이런. 이.런.


어쩌지, 그래, 괜찮아. 두 번째 방법이 있잖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방금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편히 누워 있었을 터, 나의 부탁이 반갑지만은 않는 듯한 목소리다. 그가 건넨 차선책.  어머님께 돈을 빌리라는 것이다. 자기가 전화를 해두겠단다.

뭐라고? 아들이면 끔찍인 어머님에게, 아들은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보고 며느리는 저녁약속에 나간다는데, 게다가 돈까지 빌리러 가라고? 그건 안된다. 절대 안 된다.


마지막 선택 지, 차를 갖고 갈 거다. 네비를 찍어보자. 50분. 하.

 

약속시간의 긴 바늘은 이미 넘어가 버렸다. 어머님께 돈을 빌려서 전철 타고 가면 20분 만에 도착한다.

선배들까지 오는 자리라, 너무 늦으면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어머님께 돈을.빌.리.자.


그렇게, 도둑주차를 했던 아파트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식은땀이 난다.

현관 앞에 도착했다. 차선책은 없는 것인가 다시 생각해본다. 없.다.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민망한 웃음을 장착하자. 도레미파솔 솔솔솔 음을 유지하자.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하하하'

'아니, 어딜 가길래 돈을 놓고 와서 그래'

'아, 회사 선배들이 모이는 자리에 초대되었는데, 지갑을 놓고 와서요. 하하'

'그래, 알았다'


단 한 번도 웃지 않으셨다. 조.금.도.


그나마 집에 계신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진심이다.

지금 어머님이 나를 도와 주신 것이다. 그깟 표정이 뭣이 중헌디.


어머님의 떨떠름한 무표정의 기억을 손에 쥔 파란색 종이 다섯 장으로 덮어본다.


그렇게, 검색과 통화, 한숨, 짜증, 욕이 짬뽕된 한 시간 동안의 난리브루스가 끝나고 드디어 주황색 카드 한 장이 손에 들어왔다. 하.





지하철 표를 찍고 들어가 전철에 자리 잡고 앉아 허탈하게 웃음을 날려본다.

정말 허당에 찌질이구나. 제발 좀 꼼꼼해 지자. 어떻게 날이 갈수록 더하니.


한동안 씩씩거리는 숨과 함께 자책을 반복하다 요즘 노력 중인 긍정 마인드 전환을 시도해 본다.  

안좋은 일과 좋은 일은 항상 함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에게 도움이 된 일.


가만보자. 한 시간 동안 전철 주변을 서성이며 꽤 많이 걸었다. 땀도 났다.

그래, 운동이다.

얼마 전부터 운동 인증을 시작했는데, 요걸로 하면 되겠구나.

헬스앱을 켜보자. 오, 6천보. 목표 달성이다. 예쑤.


자, 그 다음, 또 뭐가 있을까. 뭘까.

몇 일 동안 백지 위에 키보드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걸로, 한 번 써볼까?

와씨, 쓸 말 진짜 많다.


나, 오늘


글.감.생.겼.다.





*사진출처 - 서울특별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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