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도 있었고, 맛도 있었고, 글도 있었다.

Happy birthday to me.

by 리유


‘고요함, 우울함, 외로움'


매년 생일마다 내 온몸을 둘러싸는 단어들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주인공이 되어 축하받고 싶은 기대심리가 충족되지 않아서일까.


그리하여, 올해는 '내'가 '나'를 축하하고자 ‘연차휴가’를 선물했다.

세상 상쾌한 얼굴로 일어나, 아이들과 남편에게 웃으며 아침을 준비하고 9시 조금 넘어 예쁜 카페로 향하리. 그리고 그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리.


그리고 아침 8시.

후. 그렇지.

역시,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두 작은 인간들은 차려준 밥은 안 먹고, 방과후 하기 싫다고 징징. 등교 시간 15분 전, 이빨도 안 닦고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잔뜩 예민해진 남편은 미간에 두 줄을 긋고 출근준비를 하다, 갑자기 대뜸 건넨다는 말이

집정리 해라 이다. 평소에는 그런 말 일절 안 하는 남자다.

그런데, 생일인데, 그것도 오늘 처음 꺼내는 말이 집정리 해라?

참 대단하십니다.

여보세요. 오늘 내 생일이라고, 그리고 오늘만은 나를 위해 시간을 쓸 거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출근할 걸 그랬다.

출근해서 일로 엮어진 사람들에게라도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아침부터 기분이 잡쳤다. 그토록 기다렸던 온전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었건만, 그리 해보고 싶었던 우아한 책 읽기고 글쓰기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러다, 스마트폰과 한 몸이 되었다.

요새 유행인 재벌집 막내아들 요약본 몰아보기.

20분짜리를 열 편 보았으니, 200분. 3시간 넘는 시간이 순삭 되었다.

아, 이건 아닌데, 글자들로 이루어진 품격 있는 하루를 보내려고 했던 건데.

가만있어 보자. 두 시간 후면 아이들 올 시간인데, 지금이라도 카페로 출발할까? 에잇, 영하 10도다. 춥다. 왔다 갔다 30분 걸리고, 돈까지 쓰는데 뭐 하러 가나.

그렇게 스마트폰과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생일 때는 늘 미역국과 국수를 챙겨 먹었다. 특히 미역국은 늘 엄마가 끓여다 주셨다.

그런데, 이번 주는 엄마가 여행을 가셨다. 즉, 미역국이 없다는 것이다.

두 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메뉴는. 오동통통 너구리.

국수도 있고 그 안에 자잘한 미역 건더기들이 들어있다. 1타 2 피로 딱이다.

혼자 식탁에 앉아 짭짜롬한 라면을 호로록 먹으며 한 개 남은 부잣집 막내아들 짤 한편을 더 보았다.

눈도 즐겁고, 입도 신났다. 됐다. 이 정도면.


그렇게 해가 지고 집안이 어두워지니 스스로가 굉장히 한심해졌다.

아무리 재미있으면 됐다고 혼자 되뇌어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냈단 말인가. 그저 입과 눈의 재미로.


그렇게, 아이들과 남편이 돌아온 시간이 되었고, 우울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며 식탁에 앉아있었다.

그런 내 앞에 남편이 무언가를 툭 내어 놓는다.


흰쌀밥과 미역국 한 그릇.


헉. 어퍼컷이다. 감동의 한방.

두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다 문을 닫았단다.

셔터 닫는 반찬가게 주인에게 문 열어달라고 해서 간신히 사온 미역국이란다.


게다가 맛있기까지 하다. 눈물 난다.


하루의 기운과 기분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생일.
사전적 의미로는 세상에 태어난 날, 또는 태어난 날이 해마다 돌아오는 그날이다.


펜과 메모장을 들어 끄적여 본다.

생일은 축하받아야 하는 날은 맞다. 이 세상에 살게 된 날이므로.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을 살게 하는 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므로.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날 하루만 특별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는 거다. 살아내고 있는 매일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별한 일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 미묘한 작은 행복을 끄집어내어 특별하게 만끽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럼 매년 돌아오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작은 행복들이 존재하는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 급한 일이 없어 연차를 낼 수 있었고

찬장에 너구리 하나가 예쁘게 놓여있었고

오래간만에 시간 순삭하는 드라마를 만났다.

뭣보다 미역국을 시크하게 내놓는 남자도 곁에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행복이었던 것이다.

고독과 우울함에 휩싸여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감사한 순간들 말이다.


자, 이제 됐다.


2022년 12월 내가 태어난 오늘은

재미도 있었고, 맛도 있었고, 글도 있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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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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