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회사의 마음에 드는(?) 직원을 먼저 합격시키고, 인턴 기간 동안의 행실을 토대로 근무할 부서를 지정해 주는 식이었다. 물론, 1, 2 지망 부서를 취합받기도 했다.
연수 기간에 뵈었던 인사팀 과장님 한 분이, 인사 업무 해볼 생각 없냐는 질문을 두어 번 하셨고, 배치면담 시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이유는 지금도 도통 모르겠다).
그러나 웬 똥고집이었는지, 이 회사에 지원하게 된 나의 목적은 상품개발을 하기 위해서이고, 그러니 반드시 바이어를 해보겠다고 했다. 즉, 절대 인사팀 ‘따위’로는 가지 않겠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저런.. 쯧쯧.)
그렇게 나의 건방진 의지와 함께 그토록 원하던 상품팀으로 발령이 났고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절실히 깨달았다. 당시의 내 생각이 많이, 그냥도 아닌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첫 출근날을 떠올리면 스물네 살의 나라는 사람은 꽤나 뿌듯했고 즐거웠으며 발랄하고 씩씩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면접날과 백 퍼센트 똑같이 갖춰 입고 일주일 전부터 몇 번이나 메어봤던 회사 아이디카드를 금메달처럼 목에 걸고 집을 나섰다. 지금은 회사 출입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목줄이 그땐 뭐가 그리 좋았을까.
전철 속, 빈틈없이 잔디처럼 박혀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 머리 위에만은 핑크빛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그냥 다 벅찼고 좋았다.
본사 건물로 들어서니 같은 색깔과 형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출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서 있었다. 단정한 헤어와 정갈한 옷,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있는 이곳의 사람들이 똑똑하고 명석하고 댄디하고, 그러니까, 죄다 멋져 보였다. 내가 이들과 함께 섞여 있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출근 한 시간 전부터 목에 걸려 있던 아이디카드를 출입 게이트에 '띠링' 하고 대는 순간, 취업 준비를 해온 수개월 간의 좌절감이, 처절함이 일순간에 보상받는 듯했다. 내가 이 소리를 들으려고 그토록 쓰디쓴 고생을 했구나 싶었다.
로비의 엘리베이터 여섯 대는 아침 내내 사람들을 각 층으로 열심히 날랐다. 사람들은 초과인원 경고음이 울리는 순간까지 작은 박스 안에 발을 내디뎠고, 나 역시 그곳에 몸을 실었다. 숨도 편하게 쉴 수 없는 빡빡한 공간에 서 있으면서도, 갑갑함은 커녕 지금 여기에 발을 얹을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15층.
동서남북으로 시선을 돌리며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를 따라 중간 즈음 다다랐을 때 왼쪽 천장에 '상품팀' 푯말이 붙어 있었다. 저기가 내가 일할 곳이구나. 하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가는데, 저 앞에 '나 커리어 우먼이에요'를 뿜뿜 하는 멋들어진 여자 한 분이 서 계셨다. 170센티미터는 족히 넘는 키에, 갈색의 긴 생머리, 서구적인 체형과 외모까지 주변을 광나게 만드는 아우라였다. 남색 정장바지와 칼같이 다려진 흰색 셔츠를 입은 그녀는 내가 그려왔던 워킹우먼 그 자체였다.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고 있는데, 이분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또각, 또각, 또각.
"안녕하세요, 주임님. 제가 주임님 사수예요. 반가워요. 이름은 김현지고요. 이쪽으로 오실래요?"
(목소리마저 옥구슬처럼 매끄럽기도, 카랑카랑하기도 하다)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간, 사무실.
가운데 복도를 가운데 양쪽에 직사각형의 책상들이 너 다섯 개씩 빽뺵하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어서 있었다. 책상과 책상 사이에는 약 오십 센티미터 정도의 파티션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키보드를 치는 사람, 전화기를 붙잡고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서류를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끄적이는 사람 등 모두가 굉장히 열정적으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들이었다.
"여기가 주임님 자리예요."
내 자리는 복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프린터기 바로 옆이었다. 덕분에 입사 후 1년 동안 인쇄물이 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은 시간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나에게 종종 말을 걸었으며, 나는 '아~ 주임님이 신입이구나? 무슨 일 해요?'라는 질문을 수십, 수 백번 들었다. 뭐,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라는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사수가 말한다.
"따라와요. 그래도 인사는 해야죠."
빳빳한 정장을 더욱 곧게 피며 사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마도 본부 내 식구 분들께 인사를 시키려는 듯했다. 책상의 각 모둠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시작했다. 살짝 찌푸리고 있던 사람들도 나를 보며 활짝 웃어주었고, 나는 그 미소에 화답하고자. 는 아니었고, 그저 긴장감으로 가득 차 크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상품팀 OOO주임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군기가 잡혀 어색하고 큰 소리로 외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삼십 여 번의 인사를 마친 후, 복도의 정 반대 방향인 창가로 향했다. 뭔가 레베루가 달라 보이는 공간이었다. 파티션 앞에 붙어 있는 은색 판 앞에는, 윤 OO팀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책상은 다른 이들의 것 보다 두 배는 컸으며, 뒤쪽에 작은 원형 테이블과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의자 또한 목 받침대까지 있는, 인체 공학적으로 허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팀장님은 희끗한 머리에 꽤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땅땅한 체구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키는 그리 클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걸어오는 구두 소리를 듣고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뒤돌아 보셨다. 그 순간 내 목구멍에선 여태까지 했던 냈던 것 중 가장 우렁찬 소리가 나왔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입사한 OOO주임입니다!." (90도 인사)
"어, 반가워요. 잘해봅시다."
"넵! 알겠습니돻!!"
"허허, 패기가 좋구만."
"감사합니돴!" (또 90도 인사. 쩝.)
그렇게 팀장님께 인사를 마치고, 가방만 내려놓았던 내 책상 앞에 앉았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0시. 겨땀은 폭발해 있었고,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검정 에나멜 구두 속 내 발은 뚱뚱 부어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온 힘을 실어 인사했는지 목까지 칼칼했다.
손으로 종아리를 몇 번 주무르고 노트북 전원을 켜던 중 파티션에 붙어 있는 내 이름 세 글자를 발견했다. OOO주임.
내 자리가 생겼다. 집이 아닌 회사라는 곳에.
나만의 노트북과 마우스, 회사의 로고가 박힌 다이어리, 새 볼펜이 놓인 책상을 손으로 쓱 만져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잘해보자. 복잡하지만 열기가 뿜어지는 이 공간에서, 바쁘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과.
뭔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대로 해보자.
(에필로그)
그나저나, 그날 내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얼마나 웃기고도 고되었을까. 로봇같이 어색하게 몸을 90도로 구부리며, 목청 터지게 외치는 '안녕하십니까, OOO 주임입니다."라는 소리를 수십 번 들어줬어야 하니 말이다. 쩝. 얼굴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긴장감과 열정은 그대로 드러낼 것 같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거니와, 패기를 보였던 건 잘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신입사원일 때 같은 팀, 옆 팀에 계시던 몇 분들이 이제는 임원으로 근무를 하고 계신다. 그분들은 아직도 내가 씩씩하게 인사하고 다니던 때의 모습을 한 번씩 말씀하시곤 한다. 뭐 저렇게 생긴 것 같지 않게 목청 큰 신입이 들어왔나 하면서도, 꽤나 긴장한 상태에서 참 애쓴다 싶으셨다고. 오다가다 나를 볼 때마다 열정 뿜뿜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