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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애 Jul 12. 2022

꺼져버려! 블레어

자존감, 첫사랑과 함께 사라지다.

나는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금방 사라졌다. 대학생활은 뭐 그닥 내가 중심에 설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가보니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공부? 또 공부? 금세 ‘블레어’가 튀어나왔다.      


‘블레어’는 늘 하던 대로 주절거렸다.      


‘여기도 별 수 있겠어? 다 똑똑하거나 예쁜 것들이 주연이지. 나를 누가 눈여겨보기나 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공대였다. 남자들이 가장 많고 여자들이 가장 적은 곳. 그러면 그래도 나도 여자니까 눈에 띄지 않겠어? 하지만 그냥 공부는 어려웠고 친구들은 사귀기가 어려웠다. 여기 친구들은 나이도 제각각이고 다 별나고. 블레어는 그냥 걸어갈 때도 종종 튀어나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 소개해주기로 했었지. ‘블레어’는 내 인생에서 참 사라지지 않는 인격이다. 얘가 제일 친해지고 싶지 않은데 계속 나와. 젤 많이 만나는 인격이다. 늘 불평, 불만에 나에 대한 자기 비하가 제일 많다.      


“네깟게 뭐 있냐? 뭐 크게 변할 일이 있겠어?”     


아, 이것도 우울한 블레어가 늘 하는 대사이다. 뭐, 네가 그렇지 머. 오늘은 닥쳐.     

그래도 대학 생활에서 다른 점은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술’. 그것을 마시면 ‘둥둥’이가 나와서 좋았다. 이때는 블레어도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둥둥’이는 늘 기분이 좋았다.     

 

“까짓 거, 다 잊어버려.”     


술을 마시면 이성이 마비가 되어서 다이어트를 하던 것을 종종 잊어버리고 엄청난 양을 먹었다. 살이 찌는 건 싫었지만 둥둥이가 자주 나오는 것은 좋았다. 기분이라도 좋게 살아야지. 단지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나는 ‘신데렐라’처럼 9시면 오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나는 술자리에 갔을 때 안쪽에 앉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화가 오면 나가야 했는데 나 때문에 모든 선배들이 다 일어나야 하는 건 정말 쪽팔리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술자리는 다 왜 이렇게 늦게 시작하는 거야. 대낮부터 마시면 안 되는 거야? 남자 선배들은 다 잘해줬지만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나의 기대는 망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의외의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기대했던 ‘사랑’의 서막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 ‘네깟 거한테?’     


우리 과는 사람이 많아서 이름을 가, 나, 다 순으로 반을 나누었다. 아니, 여기가 무슨 고등학교야? 무슨 가, 나, 다? 어쨌든 그래서 내 친구들은 다 비슷한 성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반에는 비슷한 성밖에 없었으니까. 우리 반에는 여러 친구들이 있었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인격인 ‘리젯’은 같은 반의 같은 조원인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다 좋아했다. 리젯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감정을 이입해 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다 좋은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특징도 잘 파악했다.      


‘리젯’     

이 아이는 심지어 프랑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있어 보이지? 하지만 이 아이가 프랑스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시절 내가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책에 심취해 있었는데 배경이 프랑스혁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만화책의 영향을 받아 남몰래 소설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리젯’이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낸 이 아이는 공감 능력 좋고, 사교성 좋고. 내 인생의 웬만한 좋은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평상시에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것은 바로 이 친구의 공로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다 재미있었다. 내가 친한 여자 친구는 A, B, C 세 명, 남자는 D, F, G 세명이 제일 친했다. 주목하라. 이중에 내 첫 연애 상대가 나온다.      


나의 낮은 자존감 인격인 ‘블레어’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심지어 나에게 직진 고백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F’였다. 무엇 때문에 나한테 그러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 F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블레어는 잘 알고 있었다. 친절한 것과 관심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그래서 나는 상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F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호감을 표시해 오다가 내가 못 알아차리니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블레어는 믿지 않았다.      


‘쟤 이상해. 널 좋아한대. 야, 정신 차려. 저러다가 말 거야. 그럼 너만 상처 입어.’     


F는 막 미남은 아니었지만 키는 큰 편이고 웃을 때 눈이 처지면서 애교 있게 웃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바로 내 첫 남자 친구이자 첫 나쁜 놈이다. 아, 사귄 놈들 중 제일 나쁜 놈이던가. 그냥 내 기준상 그렇다. 제일 큰 상처를 남겼으니까. 그렇지만 하나 인정해줘야 할 공로는 그가 내 또 다른 인격을 깨웠다는 것이다. 바로 ‘앤’. 사랑을 할 때 나오는 인격이다. 어디에 나오는 ‘앤’인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걸? 바로 초록색 지붕에 살고 빨강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맞아. 바로 그 소설책의 ‘앤’이다.     


 당시에 막 태어난 이 친구는 줄곧 블레어랑 붙어 있었다. 그래서 꽤 귀찮았다. 그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하는 거야. 아, 맞다. 둘 다 나의 인격이라서 얘네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 블레어는 늘 ‘너 따위가’ 같은 이야기를 했고 ‘앤’을 자신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앤은 그래도 기대를 가졌고, 설렜고, F를 믿고자 했다. 나는 F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다중인격이지만 나도 신앙을 갖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고 언젠가 그 곁으로 돌아갈 것을 믿는다. 하지만 이 세계에 보내진 이상 나도 사람에게 사랑받고 이해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원래 아담도 짝은 만들어 주셨으니까. 나의 앤은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여태껏 한 번도 깨어나서 활동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이 아이는 처음으로 태어나서 정말 기뻤고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나 이 친구의 수명은 정말 짧았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죽었다. 3주 걸렸나. 너무 짧지 않니? 그 3주 동안 F는 갓 태어난 나의 앤에게 많은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희망을 준만큼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다.     


 어떤 방법이었냐고? 바로 배신이다. 

굳이? 그러게나 말이다. 왜 그냥 말해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데 굳이, 굳이 가장 잔인한 방법을 택하지? F가 미친놈이라서? 모르겠다. 그놈도 다중인격이었나 보지 머.     


그놈이 택한 방법은 나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내 친구에게 고백하는 방법이었다. 

어째서 순서를 바꾸지 않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먼저 헤어지고 고백해도 되잖아. 걔가 너무 좋아서 1분도 망설일 수가 없었나? 아니면 내가 매달릴까 봐 두려웠나? 그랬을 수도.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였으니 그만큼 미련이 많았을 거고 그러니까 매달려서 울 가능성도 있었겠네. 글쎄.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제일 짜증 나는 것은 블레어였다. 그 애는 나에게 ‘너는 당해도 싸지.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너는 예쁘지도 똑 부러지지도 못하다고 했었잖아?’라고 계속 얘기했다.     


어떤 방식으로 피를 말리며 앤을 죽였는지 자세히 소개해 주지. 뭔가 복수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도 좋은 방식이다. 우리는 사귀면서 밀고 당기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계시가 내려와서 나한테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가 더럽게 피곤한 성격이라는 것을 번개를 맞는 것처럼 깨달았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F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헤어지쟈던지 아니면 그만 만나자던지 하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걸 먼저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등골이 싸하게 느껴지는 느낌을 늘 주면서 F는 나를 피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었고 블레어가 발동을 걸고 있었으니 이별이 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그래도 그런 방법일 줄은 몰랐지. F야, 허를 찌르는 창의적 방법. 칭찬해.      


나는 공부에도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인 C는 나를 따로 불러내어 걱정스러워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있지, F가 B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어. 너랑 F 사이의 일을 아니까 아무래도 미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누가 쇠망치로 내리치는 느낌이 들었다. C는 B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 사실일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블레어는 나를 울지도 못하게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냥 블레어였다. 그런데 예전의 블레어랑은 조금 달랐다. 블레어는 쉴 새 없이 떠들던 그 입을 닥쳤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이게 통제가 안됐다. 밥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블레어는 통제불능이었다. 미친 블레어.      


게다가 블레어는 자기 비하를 하면서도 자존심이 더럽게 셌다. 집에서나 혼자 있을 때에만 블레어는 속삭였다.

‘네가 그렇지, 머. 너 따위를 누가 사랑하겠냐? 꿈깨.’

그리고 나는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냥 눈물이 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양 흘렀을 뿐이다.     


식욕도 없었다. 집에서는 거의 죽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던 블레어는 학교에서는 지나치게 오버했다. 나는 타고 난 입담과 주변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다. 헐. 나는 그때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게 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미친 듯이 오버했다. 블레어는 굉장했다. 그것도 재능이지. 정말 미친 듯이 오버하는데 마음은 통제가 안되게 너무 슬펐다. F를 계속 신경 썼다. 미칠 것만 같았다. 친구들이 모두 함께 외부에 놀러 나갔을 때였다. 나가 보는 앞에서 F는 B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미친 새끼. 춥다고 겉옷을 벗어주고 아주 전전긍긍하며 그녀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러 그랬나? 내 마음을 빨리 접게 도와주려고? 참 착하네. 블레어는 이 최악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너, 내가 저 새끼 믿지 말랬쟎아.”     


아니 내가 뭐 그럴 줄 알았나. 앤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인데 그럴 줄 내가 알았겠냐고. 같은 종교였다는 것이 더 안 좋았다. F는 그 후에 나를 만나서는 아주 밝은 목소리로 자기는 다 용서를 받았다고 했는데, 정말 짜증이 나더라는. 네가 용서받은 것은 다른 얘기야. 나한테 잘못한 건 나한테 잘못했다고 해야지 어디서 따로 용서를 받고 오는데? 어머, 신앙도 흔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종교의 힘을 빌어서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용서를 해야 하는 거야? 나의 죄도 용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굳이? 그 후로도 F를 가끔 보기는 했지만 나는 괜찮은 척 연기했다. 블레어, 최선을 다해야 해. 인간 같지도 않은 놈 따위 때문에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너무 상했다. 내 첫사랑의 실패는 내 다중인격만을 더욱 부추긴 채 끝났다. 굳이 가장 잔인하게 살해당한 채. 아무도 믿지 못하는 모습으로 남겨졌다.


 F야, 잘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바란다고 뭐가 바뀌겠니. 너는 잘 살겠지. 하지만 기억해 두렴. 너는 나를 죽였단다. 적어도 죄책감은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겠지? 너는 하나님께 다 용서받았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너 잊은 게 있어. 하나님께 용서는 받았어도. 그 얘기는 못 들었니? 너는 나한테 진심으로 사과는 했어야 해. 그게 순서니까. 개새끼. 아니, 개는 왜 욕을 먹나. 개보다 못한 놈.     


고상한 척하던 친구니까 지금도 어디선가 고상한 척 사람 사이에 섞여 살겠지. 하지만 난 알아 너도 다중인격이지? 어디서 나만 병자 취급이야. 저것도 인간 사이에 섞여 살다니. 같은 인간인 내가 다 창피하다.     

그러나 기세 등등하게 속으로 욕을 했어도 나는 그때 배웠다. 떠나간 마음에는 매달리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떠나간 마음에는 쿨내 나게 등을 돌리는 법을 배웠다.     


마음이 있는 것들은 배신을 하면 등을 돌려줘야 해. 미련을 남겨서 뭐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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