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게?
“안녕, 엘리사벳.”
나는 거울을 보고 말했다.
거울 속의 이 친구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뭔가 생각할 게 있거나 두근거릴 때 거울을 보면 나타나는 친구다. 나는 가끔 소리도 내서 부르기도 한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아, 나는 여러분이 흔히 보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중에서도 제일 평범한. 그냥 지나가도 전혀 모를걸. 여러분은 관심 없겠지만 내가 지금 나의 ‘다중인격장애’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른바 ‘커밍 아웃’.
정상적인 우리 부모님은 내가 이런지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른척하는 거겠지. 모르나?
알고 보면 모든 것들은 유전이라고들 한다. 나의 키도, 나의 외모도. 그러니까 나의 성격도 그리고 다중인격도 유전일지도.
나는 지금까지도 연기를 잘 해왔다.
착한 딸의 연기를, 그리고 모범생의 연기를.
칭찬은 나를 기분 좋게 하니까. 칭찬은 마치 마약 같은 것이다. ‘예쁘다. 공부를 잘한다. 모범적이다. 너를 믿는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취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나는 그쪽으로 몰두하여 연기를 했다. 나는 참 착했다. 착하다는 것과 병신 같다는 말은 한 끝 차이지만.
내가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다.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참 예뻤다. 예쁜 애랑 어울려 노는 게 아닌데. 나는 그렇게 영민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원래 예쁜 애랑 놀면 시종밖에 못 되는 법이다. 뭐. 어려서 잘 몰랐으니까. 솔직히 예쁜 것도 알고 보면 유전이다. 엄마를 닮거나 아빠를 닮은 거였겠지.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다른 반 선생님에게 우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친구는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쁘게 생긴 애.” 그리고 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얘는 우리 반에서 가장 똑똑하고 모범적인 애야.”
그때 나의 인격 중 하나가 말했다.
‘야, 너는 예쁜 쪽으로는 아무래도 텄어. 그러니까 모범적인 쪽으로 집중해서 관리해야 해.’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지금까지 다른 인격들을 꾹꾹 누르면서 그렇게 연기하며 살아왔다.
오늘은 그래도 내 인생에서 좀 다른 내가 되어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엘리사벳을 마주했다.
“이제 매일 너를 바라보면서 내가 뭐가 돼야 할까 묻는 생활이 끝나겠구나.”
그랬다. 나는 매일 거울을 보면서 물었다. 나는 뭐가 되겠니?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사랑받을 수 있을까?
걔가 어떻게 알아.
그래서 늘 답은 없었다. 그 애는 나를 늘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마주 보았을 뿐.
후에 깨달았는데, 그걸 물을 시간에 공부를 더 하는 게 나았었을 듯싶기도 하고.
“오늘은 드디어 대학교에 가는 거니까. 이제 좀 인생 좀 피고 살아야지.”
‘엘리사벳’
외국 이름인 이유가 뭐냐고?
전에 ‘엘리사벳’이라는 뮤지컬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뮤지컬의 주인공 ‘엘리사벳’은 죽음의 신의 사랑을 지독하게 받는 역할이었다. 뭐가 되었든 사랑을 지독하게 받는다쟎아. 사랑을 엄청 갈구하는 엘리사벳은 오늘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해왔다. 바로 ‘다이어트’를 엄청 열심히 했던 것이다. 매일 운동장을 돌고 뭔가 먹으면 토할 정도로 열심히 뺐지만 그렇게 예쁜 몸매를 가질 수는 없었다. 원본이 태어날 때부터 날씬해 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 너무 하체에 살이 많이 붙어서 약간 비정상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던 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막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남들한테 예쁘게 보여야 하잖아. 그리고 남자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그렇다. 남자 친구.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연애라는 것을 경험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막연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혹시 알아? 나도 주연이 될 수 있을지. 나도 사랑받을 수도 있지.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도 있을지도 몰라. 누군가 나를 섬겨줄 수도 있고. 한 번 시작해보자.
저 아래서 블레어가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어이쿠, 네까짓게? 사랑? 누가 널 좋아하겠어?’
하지만 오늘은 저 속삭임을 닥치게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엘리사벳이 더 강하거든.
얘는 또 누구냐고? 나중에 소개해 줘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얘도 수많은 ‘나’를 구성하는 인격 중에 하나이다. 나는 다중인격이라니깐.
그때는 몰랐다. 얼마나 처참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건지를. 나처럼 자신도 없는, 자존감이 바닥이고 내성적인, 다중인격의 미친년인 내가, 소위 인간의 ‘사랑’이라는 싸움에서 또 어떤 인격을 드러내게 될지를 그때는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