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게 군대 이야기가 있다면, 여자들에게는 입덧과 출산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무용담처럼 출산의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는 정말 죽을 뻔했고 정말 고생했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가 하나라 딱 한 번 겪었을 뿐이지만 이때에 입덧과 우울증이 워낙 지독했기에 무용담으로 남기고자 한다.
나는 결혼을 하고 바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허니문 베이비'.
아이를 계획하고 갖은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의 정신은 외출을 했었다. 이게 웬일? 아직 결혼 생활에 적응도 못 했는데 아이라니.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더구나 나는 자궁에 혹이 있어서 아이를 갖기 힘들다고 수술을 받고 나서 아이를 가지라고 했었는데. 수술을 받지도 않았는데 아기가 생겼다. 혹이 커서 아기가 자궁 밖으로 밀릴 수도 있다고 병원에서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아기는 꿋꿋했고 내가 배를 쥐어짜는 고통을 느끼는 동안 당당하게 혹을 밀어내고 평안하게 뱃속에 자리 잡았다. 그 당시 중학교 2학년 담임이었던 나는 도저히 통증과 입덧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고 집에 머물게 되었다. 차라리 그냥 학교에 출근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던 것은 아침에 눈뜨고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밀려오는 구역질과 싸울 때였다. 그냥 출근하면 주의력이 분산되어 이 끔찍한 입덧을 좀 덜 느끼지 않았을까.
"너 뭐 먹고 싶니?"
남편, 부모님, 시부모님이 모두 물어보셨지만 나는 '아무것도' ,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토하는데 뭐가 먹고 싶단 말인가. 냉장고를 열어도 토하고, 화장실에 가도 토하고. 눈을 뜨면 그냥 토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열 달 지나면 반드시 끝나는 고통이라는데 정말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다.
"오빠, 매일 눈뜨고 10을 세면 시작되는 건데, 내릴 수 없는 배에 올라탄 느낌이야."
나는 입덧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안, 나는 멀미를 안 해봐서."
남편은 남의 속도 모르고 방글방글 웃었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입덧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복숭아'.
그것도 몰캉몰캉하고 껍질이 훅훅 벗겨지며 깨무는 순간 즙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복숭아를.
그때의 나에게는 복숭아가 왜 그렇게 비싸 보였는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이 벌어오는 것만으로 살아보니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복숭아가 먹고 싶은데 너무 비싸."
"아이고, 그냥 사 먹어."
남편은 턱턱 큰 소리를 쳤지만 그렇다고 사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냥 자기가 사오면 되쟎아.
시부모님께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셨을 때도 나는 뭐가 마음에 걸렸는지 '복숭아'라고 얘기하지 못하고 '과일'이 먹고 싶다고 했다. 왜, 왜, 왜, 왜 그랬을까.
어느 날 시부모님께서 급작스럽게 방문하셨는데, 정말 커다란 박스를 두 박스나 들고 오셨다. 참고로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재래시장에서 대부분의 물건을 사다 주셨는데 박스로 사시는 경향이 있으셨다. 나는 이 박스들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 엄마, 이 많은 자두를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거예요."
퇴근한 남편은 시부모님께 전화를 걸고 이야기했다. 그랬다. 정말 두 상자 가득 토마토와 자두가 있었다.
그냥 복숭아라고 얘기할걸.
우리는 이 과일들을 이웃들에게도 나누어주고, 열심히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또 토마토와 자두는 속이 받지를 않아서 많이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 많은 자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은 그 당시 살이 엄청 올랐었는데 아마 자두 살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자두를 먹고, 또 먹고, 나중에는 갈아먹어 보기도 하고 우유 등과 섞어 먹어 보기도 했다.
나는 그 후로 '자두'는 많이 사지 않는다. 대신 그 후로 비싸도 복숭아는 계절이 되면 꼭 몇 개씩은 먹어주는 습관이 생겼다. 그냥 먹으면 됐었는데, 복숭아, 왜 못 먹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