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살이

상대의 관심을 독식하려는 자기 파괴적인 노력

by 정이든

어느 연인들에 대한 얘기다.


사람이 사람을 항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자신감인지 A는 B를 온전히 가질 수 있다고 믿었었다.


상대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관심이 100이라고 할 때, A는 언제나 그 100을 온전히 원했다. 그것은 99나 98이어서도 안된다. 1,2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부여될 수도 있다는 것은, 나중에는 3, 4, 5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방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A는 99가 아닌 나머지 1의 행방에 초점을 맞췄다. 덕분에 생긴 A의 불안증은 과거 B의 관심을 독식했던 전 연인들에 대한 질투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A와 B의 만남을 나는 ‘질투살이’라고 정의한다. 99를 보지 않고 1의 결핍에 집중하는 방식.


질투살이는 순기능도 있어서, 둘의 관계에서 A의 에너지를 기꺼이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를테면 A는 다른 이성이 섞인 모임이 있던 날이면, B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춰 집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날은 무척 피곤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A는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의 끝은 좋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질투는 질투를 낳고, 집착을 낳는다. A는 집요하게 99를 100으로 만들고자 했다. B의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려 한 거다. A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둘의 관계를 코너로 몰아넣거나, 질투 유발 작전으로 본인 또한 상대에게 100이 아닐 수 있음을 드러내는 유치한 협박도 했다.


B도 A처럼 질투살이에 일부 동참했던 덕분에, A와 B는 긴 시간 서로를 놓지 못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나머지 1을 좇던 A는 결국 99도 지키지 못하고 이별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질투살이면 뭐 어떤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상대의 관심도가 99가 되고 90이 됐다가 80, 70… 으로 줄어드는 걸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것보다는, 조금 억지스럽게라도 남은 1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방법이 B에게도 제대로 작동하는 방법이라면) 둘의 관계는 유지할 수 있는 땔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조금씩 사그라드는 불길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보다는 집요하더라도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 때로 자기 파괴적이긴 하지만.


또는 건강한 연인관계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기대를 낮추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끊임없이, 하는 관계라는 생각도 해본다. 항상 상대에 대한 관심이 100일 수는 없으니까.


억지로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 하루하루를 전력 질주하기보다는, 안정과 믿음에 기반한 관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협력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연인이 사랑하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

keyword
이전 09화기대 낮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