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거리를 다시 사랑하는 법
첫 직장을 종로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지금도 종로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종로에서 일한 지도 벌써 십몇 년이 지났다.
이제는 강남, 여의도, 또는 다른 동네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역삼역 인근에서 일하다가 이직한 동료에게 들어보니, 강남은 빌딩만 즐비하여 맛집 찾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고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종로에서 일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정말 그런가? 다른 곳에서 일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정든 종로 거리지만, 회사로의 출퇴근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운 처지다. 아무리 다채로운 것이 있어도, 매일 보다 보면 관심이 줄어든 탓이다. 덜 듣고, 덜 인지하고, 덜 기대하며 걷는다. 세상을 경외감에 바라볼 줄 알던 순수함이 없어진 탓일까, 아니면 일상이 된 탓에 내 기대의 역치가 높아진 탓일까. 둘 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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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나를 포함한) 직장인들이 생기를 찾는 것은 점심시간이다. 점심 약속이라도 있을 때면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고 잠시라도 거리를 걷는다.
평일 점심시간 종로, 광화문, 을지로, 청계천 거리는 사원증을 멘 직장인들이 점령하고 있다. 이 짧은 산책으로 직장인들은 혈당스파이크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걷는 직장인들의 표정에는 어떻게든 산책을 해야 한다는 비장함과, 긴장감의 스위치를 off 시킨 덕분에 되찾은 여유가 5:5 정도로 섞여 있다. 덕분에 북적이고 생기가 흘러넘치던 거리는, 점심시간이 끝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얌전해지곤 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강남에서 이직했다는 그 동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테헤란로 빌딩숲 산책보다는, 거리에서 양말도 팔고 버스킹도 하는, 좁아졌다 넓어졌다가, 붐볐다가 조용해지는 종로 거리가 확실히 산책할 맛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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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는 참 신기한 곳이다. 탑골공원 근처에는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거리가 있다. 내기를 하시는 건지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꼭 뒤에서 훈수 두는 분들이 있다.) 근처에는 저렴한 국밥과 부속고기를 파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탑골공원에서 낙원상가를 지나 조금 더 가면 핫한 익선동이 있다.
익선동 근처 종로3가 포차거리는 저녁이면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나 같은 직장인 아재들이 모여서 어묵 국물에 소주 한잔 하면서 인생을 달래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핫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종로3가에서 조금 더 넘어가면 인스타그래머블한 카페들이 도열한 서순라길도 나온다. 종각 젊음의 거리, 인사동, 삼청동 같은 곳들도 거리마다 개성이 흘러넘친다.
그에 반해 광화문은 또 느낌이 달라서, 큰 고층건물들이 광화문광장에서 종각역과 을지로까지 줄지어 서 있다. 여느 종로 거리보다 직장인들이 많은 곳이다.
요즘은 광화문 광장과 청계천이 유명해져서, 관광객들도 광화문을 많이 찾는다. 예전에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유럽인지 미국인지 모를 서구권 가족단위의 관광객들과 동남아 관광객들도 많이 늘어났다.
그래서 퇴근길에 광화문역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높은 확률로 외국인 관광객 무리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나와 바톤터치를 하고, 저녁시간부터 나 대신 광화문의 일원이 되어 준다.
광화문역 입구를 올라오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나와 확연히 다르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늘어져서 밀린 넷플릭스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앞만 보며 걷는 나와는 달리, 관광객들은 걸음에 여유가 있을뿐더러 항상 두리번거리며 눈을 반짝이고 있다. '오 여기가 광화문이군' 하며 풍경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담으려고 하는 듯하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선이 다르면 다른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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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최근에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나온 지 30주년이나 된, 삶에 대한 태도와 창의력에 관련된 상당히 유명한 에세이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은 줄곳 내 주변과, 사람과,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권유한다. 또한, 매일 아침 '모닝 페이지'를 쓰며 하루를 준비하고, '아티스트 데이트'라는 이름으로 주 1회는 평소 안 갈 것 같은 새로운 곳에 가서 창의성을 일깨워 보라고 한다.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매일 지나치는 광화문 거리를 허투루 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었다. 언제든 필요할 때 맞닿을 수 있어 중요함을 망각한 관계처럼. 또는 언젠가 떠날 수도 있는 이방인처럼 정을 두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일상적인 것은 그것이 일상적이기에 가장 특별하다. 내가 귀 기울이고 의미를 부여하면 보통의 것들도 소중한 것이 된다. 빌딩 앞 조형물, 새로 생긴 카페, 계절마다 바뀌는 나무와 거리의 냄새, 뒤에서 들리는 자전거 경적 소리도 내가 마주한 일상의 소중한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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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난주의 하루는 퇴근길에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끄고 퇴근길에 나서 보았다. 나름의 방식으로 '아티스트 데이트'를 실천한 셈이다. 매번 주변 소음을 차단하고 '오늘 저녁은 뭐 먹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퇴근하던 내가 거리의 소음과 노래를 섞어서 주변을 의식하며 걸어 본 것이다.
선곡은 Coldplay의 'VIVA LA VIDA'였다. 웅장한 행진곡 느낌의 노래가 내 걸음과 거리의 소음을 중재해 준 덕분에, 마음이 한결 더 여유로웠다. 나는 관광객과 직장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채로 보도 위를 걸었다.
무엇이 성공한 삶인가. 오늘 하루의 성공도 족하다. 노래가 멋지고, 이 거리도 멋지다. 우리는 반딧불이가 아니라 빛나는 별이 맞다.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멋지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