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선택하는 순간
14:00
민주는 동욱이 카페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매번 약속 때마다 조금씩 늦는 동욱을 타박하던 민주였지만, 오늘은 조금 늦어도 봐줄 심산이었다. 동욱이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도 그란데 사이즈로 시켜 두었다.
1주일 전, 동욱은 민주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제 한 달만 더 있으면 사귄 지도 2주년이 되어가는데 이별이라니. 민주는 믿기지가 않았다. 2주년 기념 여행을 가려고 나란히 공원 벤치에 앉아 숙소와 맛집을 찾던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방으로의 발령.
리테일 회사에 다니는 동욱은 새롭게 런칭한 지방 사업장에서 물류 매니저를 맡게 되었다. 지방 사업장이지만 나름 관리자급으로 올라서는 것이라 좋은 기회라고 했다. 동욱의 발령이 그가 자처한 것인지 어떤 맥락이었는지 민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동욱은 자신의 발령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간의 크고 작은 다툼에 지쳤다는 둥,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둥 애꿎은 핑계를 덧대어가며 헤어짐을 고했다.
민주는 동욱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잔인했을 것이다.
민주는 빨대를 질끈 물었다.
14:07
동욱이 카페에 도착했다. 그는 민주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를 보여주려는 듯 검은색 후드티에 편한 조거팬츠를 입고 흰 무지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평소의 편한 데이트였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도 거의 2년을 함께 한 여자친구와 작별의 날이 될 수도 있는 날 아닌가. 그가 조금 포멀한 옷을 입어 예의를 갖춰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침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며 고른 원피스와 메이크업이 떠올랐다.
하지만 민주는 침착하기로 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선택하는 것은 동욱의 자유다. 이런 지엽적인 것에서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며, 민주는 휴- 하고 심호흡을 했다.
"왔어?"
"응."
동욱은 맞은편에 앉아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여 커피를 바라보았다.
"잘 마실게"
"그래."
동욱이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14:09
민주는 아무 말이 없는 동욱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자신도 고개를 떨군다. 이제 다시 고개를 들면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운동 전의 준비운동처럼, 잠시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
1주일 전, 그나마 직접 만나서 헤어짐을 통보받은 것은 민주에게 위로가 되는 지점이었다. 갈등을 회피하는 동욱의 성향상 카톡이나 전화로 이별을 통보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더 기분이 최악이었을 것이다. 다만 민주는 더 완전하게 마침표가 찍힌 느낌이 들어 슬펐다.
헤어진 다음 날은 씩씩거리며 밥도 잘 먹었고, 둘째 날은 친구를 만나 술도 진탕 마셨다.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는 취기에 동욱에게 연락할까 봐 걱정했지만, 친구가 절대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떠올라 용케도 민주는 베개를 끌어안고 조용히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이 문제였다. 일어나 숙취에 속을 부여잡던 민주는 친구에게 속쓰림을 하소연하였으나 친구의 심심한 반응에 마음 한편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시시콜콜 위로해 줄 동욱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미 이해했건만 마음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까지도 속이 쓰렸다. 그래서 민주는 동욱에게 연락을 하고야 말았다.
14:12
둘은 몇 분째 아무 말이 없다. 간헐적으로 커피만 홀짝 마실 뿐이다. 아무래도 민주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 터였다. 민주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았어."
동욱이 슬쩍 고개를 들어 민주를 바라본다. 둘은 3초 정도 눈을 마주쳤으나 민주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인 탓에 동욱의 시선이 다음에 어디를 향했는지 민주는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잘할게. 지방 발령, 나는 괜찮아. 내가 자주 보러 내려가면..."
"얘기 끝난 걸로 알았는데."
차가운 목소리. 평소 알던 동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딘가 감정의 나사가 빠진 듯한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민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울컥함과 실망감이 동시에 빠져나오려다 어느 하나 나오지 못하고 틈을 메웠다.
"그래 알아. 그치만 우리가 지금껏 만나온 시간이 있잖아. 그리고 말야,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모르..."
"아까는 잘못한 게 많다더니 이제는 왜 모르겠다는 거야?"
또 말을 끊는 동욱의 모습에 민주는 서러움이 북받쳤으나 애써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숙이고 말았다. 사실 민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나오는 말을 주절주절 내뱉으며 동욱을 설득하려 할 뿐이었다.
무기력하다. 그러나 끝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버텨보려, 항복하지 않으려 애썼다. 민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과했다가, 조금 토라진 척도 해 봤다가, 구슬리다가, 체념한 표정으로 잠시 멍하게 있기도 했다.
14:21
"얘기 끝났으면 나 갈게."
라며 몸을 일으키려는 동욱의 모습을 보며, 민주는 울컥, 하고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말이 끝난 것은 맞다. 그러나 아직 내가 끝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매정하게 나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르르 하고 눈물이 흐르자, 동욱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민주는 정말이지 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자신의 체념과 무력함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꼴이다. 아무리 절실하다 하더라도 자존감을 버리는 순간 그것은 기존의 연애의 연장선이 아닌 새로운 강자와 약자와의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임을 민주는 지난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본능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눈물이라는 것은 결코 함부로 흘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듯이, 민주도 동욱과의 관계의 종말에 앞서 2년여간 있었던 둘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 그리고 둘이 나눴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가족과 사랑과 일과, 먹는 것과 듣는 것과 보는 것에 대한 대화들, 맞잡은 손의 온기와 향기와 말투, 표정 같은 것들. 이 영역들에서 둘은 각자의 미묘한 특징이나 변화들을 가장 명료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거나, 또는 조율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 많은 활동들이 이제 무의미해진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두 사람의 서사는 민주가 간간이 떠올리다가 곧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14:27
동욱이 우는 민주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다시 앉은 덕분에, 둘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동욱의 자세는 의자 뒤로 젖혀져 민주와의 거리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직전의 냉정함은 누그러졌고 약간의 긴장감과 미안함 마저 감돌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민주의 울음이 어느 정도 적중한 셈이었다.
민주가 진정을 되찾고 울음을 그치자 둘은 계속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차분한 듯 보였으나 감정이 올랐다 내린 탓에 비 온 뒤 미처 마르지 못한 흙길처럼 추적거렸다. 대화의 발걸음은 흙탕물이라도 튈까 봐 한 발 한 발 신중하고 명료해졌다.
민주는 이때다 싶어 다시 한번 동욱에 대한 설득을 시도했다. '일단 떨어져서 지내보고 그래도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자'는 민주의 제안에 동욱은 즉각적인 거절을 고하지 않았다. 민주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다.
민주가 동욱의 손을 꼭 잡았다. 동욱은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민주는 안도감을 느꼈다.
14:30
그러나 문제는 민주의 마음 한편에 왜일지 모를 부담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담감? 왜지?
동욱의 마음만 돌아올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민주였다. 그 과정에서 자존심 따위는 버려도 된다고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동욱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냥 기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감정을 다 쏟고 나니, 둘러싼 안개가 걷힌 까닭일까.
그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영양제를 매일 먹겠다고 2시 30분에 알람을 맞춘 민주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멀티비타민, 오메가3, 마그네슘, 프로폴리스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한다. 그렇게 집에 쌓아둔 영양제 박스들을 보다가, 특단의 조치로 매일 2시 30분에 '영양제 챙겨 먹기'라는 알람을 만들어 뒀었다.
재빨리 알람을 껐다. 동욱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14:43
둘의 협상은 나름의 진전이 있어서, 둘은 극적으로 화해하고 다시 만나는 것에 동의하였다. 말로써 어떠한 선언문이 낭독된 것은 아니었으나, 동욱의 누그러진 말투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등에서 전쟁은 끝나고 곧 휴전결정이 내려질 터였다.
하지만 민주는 동욱의 대화에 크게 집중하지 못했다. 영양제 생각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둘이 화해하게 된 것인지를 누군가 설명하라고 하면 쉽게 정리하지 못할 것 같다.
알람이 울린지 벌써 10분이 넘게 지났다. 내일 눈떨림이 온다면 오늘 마그네슘을 먹지 못한 탓이다. 민주는 눈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2시 30분의 영양제 알람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민주의 의식을 깨웠다. 2시 30분 이후 민주는 동욱과의 대화에 100% 집중하지 못한 채 중간중간 딴생각에 빠졌다. 동욱은 민주가 그저 감정을 추스르는 중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민주의 생각은 영양제로부터 건강, 평소의 루틴, 잠과 꿈, 일과 행복과 같은 것들을 거쳐, 흘러가고 있었다.
14:45
이제 민주의 생각은 '자존감'이라는 워딩에 걸쳐 있다. 자존감이란 무엇일까. 민주는 자신이 자존감을 버린 모습을 상상했다. 애초에 2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순간에 자존감을 버리고 종속된 포켓몬처럼 동욱에게 맞춰 살아갔다면 어땠을까.
불현듯 어린 시절의 장면이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친한 짝꿍이 갑자기 냉랭해진 적이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친구의 환심을 다시 사려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친구의 정색이었다. 친구에게 뭔가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건너 들었으나, 민주는 억지로 실타래를 풀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민주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굽힐 수 있지만 부러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 자신이 버려서는 안 되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지금 비굴할 필요 없다. 나는 나로서 소중하니까. 이제는 자신이 조금 전에 왜 울었는지조차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을 차린 민주였다.
14:53
동욱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던 민주는 동욱과의 재회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만남을 가지더라도, 아마 둘은 곧 헤어질 것이다. 스파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다 타버린 성냥 같은 관계에서 장거리 연애는 쥐약이다.
민주는 여전히 동욱을 사랑하고 있으나, 실은 민주도 동욱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민주가 동욱을 붙잡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동시에 민주의 마음 한편에서 그녀는 관계의 종료 버튼을 누를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14:55
자신을 설득하다가 다시 포기 모드로 바뀐 민주의 모습에 동욱은 조금 당황한 듯하였으나, 억지로 민주의 변화를 수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둘은 각자에 복잡 미묘한 변화에 대해 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 덕분이다. 이제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맞다. 민주와 동욱은 여기서 만남을 종료하는 것으로 최종합의를 마쳤다.
15:00
마침 둘 다 커피를 다 마셨다. 민주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동욱은 기대지도, 내밀지도 않고 있던 상체를 의자에 꼿꼿이 세우며 이제 일어날 채비를 마쳤다.
둘은 동시에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햇살이 밝은 날이었으나 군데군데 구름이 끼어 있었다. 마침 둘이 나온 순간 구름이 햇살을 가리며 눈부심을 피할 수 있었다.
둘은 악수를 했다. 그 와중에도 민주는 동욱과 포옹하는 모습을 잠시 상상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예전처럼 뚜렷한 기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일이면 다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지금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는 자존감을 확실히 지키는 것을 선택해 보기로 했다. 과거 몇 번의 이별에서 해보지 못한 시도다.
민주는 집에 가서 2시 30분에 맞춰 못 먹은 영양제를 챙겨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속 쓰림 따위의 이유로 동욱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기로 했다.
fin
표지 : ChatGPT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