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모두에게 공감하는 것'은 어렵다. 그만큼 '모두가 나를 공감해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의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금방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는 명제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1과 2를 만났다. (아, 참고로 1과 2는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편의상 부여한 숫자일 뿐 어떠한 우선순위나 의미는 없다.)
알게 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으나 1,2와 셋이서만 저녁을 먹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려던 건 전혀 아니었는데 근사한 술집을 소개해준 덕분에 간만에 살짝 취기가 오를 정도로 술을 마셨다.
우리는 각자의 근황을 공유했다. 이해관계가 없는 편한 사이에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그 일상의 내재된 의미를 계속 파훼하지 않아도 되어 편하다. 그래서 나도 더 술술 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처음 1과 2를 만나기로 했을 때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논쟁까지도 기대(?)했던 것 같다. 1과 2는 생각이 깊은 친구들인데, 이런 속 깊은 사람들과 소규모로 대화하는 것이 오랜만이어서 더 그랬나 보다.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한 대화도, 이어지다 보면 진지한 생각의 공유로 진화 발전할 때가 있다. 그러면 서로의 철학, 사상이 슬쩍 드러나게 되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각자의 생각을 공감할지 또는 반박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평소 이 지점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조금 더 발을 내밀면 본격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슬금 발을 빼는 편이다. 그러나 이 날 1과 2에게만큼은 두려움과 기대 둘 모두를 안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날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2의 스펙터클한 일상이 메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실컷 웃으면서 즐겁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존경감]
나이나 사회경험만으로 보면 1과 2는 내게 한참 후배들이다. 하지만 둘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존경감까지 느끼기도 한다. 나보다 훨씬 생각이 깊고 일도, 공부도, 모임도 모두 활발히 하는 친구들이다.
존경감? 언젠가 한번 '나는 어떤 사람에 대해 존경감을 느끼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름 내린 결론은 '삶에 대한 진정성'과 '타인에 대한 수용성'을 가진 사람에게 존경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일을 잘하거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것은 별 상관없었던 듯하다. 그런 것들은 운이 좋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진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해 봤다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레고 하나를 조립하며 몰입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버리고 껍데기를 덮어쓴채 살아가곤 하는데, (물론 나 또한 상당 부분 그럴 것이고) 그것을 이겨내고 다시 진정성을 회복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진정성만 추구하다 보면 배타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내가 최선을 다하듯 상대도 매번 최선이길 바란다거나, 나의 방식과 상대의 방식이 다른 것을 옳고 그름으로 정의하는 탓이다.
그래서 타자를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설령 이해되지 않더라도) 마음의 격(格)까지 갖춘 사람에게는 비로소 존경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질문]
2는 매우 오랜만에 만났다. 거의 2년 만에 봤는데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무척 건강해 보였다. 특히 잠을 푹 잔 건지, 또는 핫하다는 고깃집에서 소금구이를 먹게 되어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눈빛이 초롱초롱해 보기 좋았다.
2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종로의 한 고깃집의 회식에서 만났었다. 그때의 2는 정말이지 말이 많고 에고(ego)가 강한 친구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성격은 보통 밉상으로 보이기 마련인데도 2는 전혀 밉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나 만난 2는 예전보다 더 잘 듣고 질문을 많이 하는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질문을 하는 것에 익숙하던 나는 오랜만에 이런저런 나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이 어색하였다. 하지만 소소하게 관심받는 느낌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관심이 필요한 존재들이니까.
그래서일까, 사람의 더 낫고 덜 나음을 내가 감히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나는 지금 2의 모습도 참 멋져 보인다.
[전력질주]
2는 일상에서 전력질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쉬워했다. 인생은 원래 전력질주하는 것이 아님을 얘기해주고 싶었으나 내 언변이 서툰 탓에 잘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다. 쉬엄쉬엄 하라는 나의 말이 실상은 게으른 나의 변명처럼 느껴져 스스로 뜨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
1은 최근 업무로 마주칠 기회가 많았던 친구다. 1은 일을 참 잘한다.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잘하느냐 하면 명료하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일을 잘한다는 것을 막상 한마디로 정의하려니 어렵다. 그냥 펑크 내지 않고 시간 내에 일을 잘 완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HR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보통 KSA를 언급한다. Knowledge (지식), Skill (기술), Attitude(태도)의 앞글자를 딴 말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Attitude를 가장 중시하는 것 같다. 그냥 일만 끝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일에 대한 태도가 남다른 친구가 있다. 1은 후자다.
[일관성]
태도뿐만 아니다. 1은 모든 일을 자박자박 혼자서, 또는 열정적으로 함께 잘 해내면서도 항상 일관성이 있다. 기복 없이 계속 잘 해내는 것이다. 좀 힘들어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렇네. 일관성도 참 중요하다.
일관성 있게 평생 전력질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게 안된다. 그러니 자신이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달릴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속도를 잘 알아채고, 그것을 조금씩 높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돈이든 끈기든 흥미든 또는 스스로를 강하게 담금질한 결과이든 그 원천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관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두 사람의 울림]
집에 가는 길, 얼마 전 한 선배가 내게 털어놓았던 고민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수록,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고. 젊었을 때는 열심히 맞장구도 치고 얘기도 들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어렵다 한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상대방을 기꺼이 수용하려고 해야 할까. 또는 교정하고 맞춰보려 노력해야 할까. 아니면 어차피 우린 다름을 인정하며 그저 다음 발걸음을 축하하고 재촉해야 할까.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출발해 이 순간 잠시 스쳐가는 타인이다.
1,2의 맥락은 나와는 달라서 우리 세 명은 영원히 100%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고무적인 점은 셋 모두 책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한정원 '시와 산책', 서윤후 '쓰기 일기', 곽아람 '쓰는 직업', 서은국 '행복의 기원',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같은 책들을 추천받았다. 찬찬히 다 읽어볼 생각이다.
두 사람의 울림이 마음에 와닿았다. 울림이 있는 모임은 언제든 옳고 감사하다. 나는 그저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방점을 두기로 했다.
[에필로그 겸 상상]
무대에 올랐다. 탭댄스처럼 타닥타닥 발재간만 부리면 될 줄 알고 반짝이는 검정 구두를 신었으나, 왈츠나 탱고를 춰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였다. 하지만 춤에는 문외한인 덕분에 그저 또각거리며 발을 허둥거려 보았다. 나름대로 흥이 올라 쨍한 조명에도 빛 번짐이 적었다.
무대를 빠져나온다. 붕 날아서 나왔나 뛰어나왔나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붐비는 명동 한복판에서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해먹을 연결하고 책을 읽다가 잠든다.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지만 각자에 관심이 없어 다행이다. 전깃줄이 하늘을 틈틈이 가려 조금 아쉽긴 했다.
그렇게 바다를 건너, 우주를 거닐다가 무지개처럼 지구로 내려온 순간 나는 잠을 깼다.
하루가 지나 있었고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아, 출근할 시간이구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