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이 '양면거울'이라는 두 번째 산문집을 구상했을 당시, 나는 인생의 양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퇴근 후 저녁에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헬스를 미뤄두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시 잠들었을 뿐이다. 잠이 깨고, 오후 10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오늘은 글렀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 깨달았다. 잘 정돈된 팬트리처럼 내 일상도 깔끔하고 계획적이며 착착 이뤄졌으면 하던 나의 오래된 바람은 결코 완벽히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약간의 패배감도 들었다. 정돈되기는커녕 뒤죽박죽 된 현관 앞 택배박스들 틈에서 나는 계속 허우적거려야 하는 걸까?
좌절하는 그 지점에서 멈추는 순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없다. 아니,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명백한 잘못이 아닌 이상 이 복잡계 세상에서 누가 옳고 나쁨을 감히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날 나는 그냥 푹 자기로 했다.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무슨 꿈이었을까? 중간에 깨지 않은 걸 보니 나쁜 꿈은 아니었나 보다. 백설공주를 찾는 왕비가 거울과 싸우는 꿈이었을까, 일어나서 허둥지둥 출근하는 길에 에세이집 제목을 '양면거울'로 정했던 것을 보면.
사람은 복잡한 동물이지만 의외로 한 번에 하나의 의식만 유지할 수 있다. 내가 보는 부분만, 보는 것만큼 보인다. 내가 앞면을 응시하는 순간에 절대 뒷면은 확인할 수 없는 양면거울이지만, 우리는 뒷면을 상상하며 계속 뒤집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순수함이 무뎌져 감을 느끼는 것은 슬프다. 땅에 던지면 어디로 튈지 모를 다각형의 돌이 아닌, 물제비 하기 좋은 둥글둥글한 자갈이 된 듯하다. 그래서, 아쉬운 것인지 안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가끔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전에는 이럴 때마다 어떻게든 해결하려 매번 발을 동동 굴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튀어 오르기 위해 잠시 숨을 응집하는 구간이라 생각해 본다. '자기 합리화'와 '여유' 사이 어딘가에 닻을 내려, 슬그머니 정박해 본다. 더 이상 내 탄력만으로 통통 튈 수 없는 탓이다. 아니다. 원래도 우리 모두는 혼자서는 튀어 다닐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럴 때는 조용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것이 최고다. 멈춘 것이 아니라 쉬고 있는 것이다. 숨을 크게 쉬고 잠시 멈추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운 좋게 보이기도 한다.
삶은 이벤트들로 가득 차 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것, 버스에 탔으나 앉을자리가 없는 것, 점심 메뉴가 부대찌개인 것 모두가 이벤트다. 대부분은 소소하여 잊히는 흔한 것들이거나, 가끔 우리를 뒤흔드는 커다란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우발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을 조율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단조로운 삶에 온전함을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평온함이야 말로 얼마나 큰 인생의 복인가. 몇 번씩 출렁임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일상의 우산과 버스와 부대찌개에 안도감을 시럽처럼 한 스푼 풀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광고 카피라이터인 유병욱 작가는 '인생의 해상도'라는 책에서 인생의 여섯 가지 도구를 키워드 형태로 언급한다. 일상의 다양한 자극을 감지하는 '센서'와,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관점', 관심을 쌓아가며 깊이 탐구하는 '겹', 경험을 충분히 즐기는 '음미', 창작을 통해 확장하는 '창조', 반복 실천하는 '매일'. (정말 좋은 책이니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의식적으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더 영민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숙고하여 내 일부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끝없이 해 나가는 것. 굳이 끄집어 내보고, 냄새를 깊이 들이마셔 보고, 골똘히 몰두해 보는 것. 그러다가 하루의 평범함에 손을 놓치는 날이 있겠으나 내일이면 다시 꽉 잡아낼 수 있는 복원력까지 있다면 좋겠다.
지금 나의 속도가 적당한지, 우리가 바른 곳으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계기판과 내비게이션이 없는 우리의 삶은 그저 타인의 속도와 나의 직감으로만 그 속도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애초에 적당한 속도라는 것이 있을까.
어린 시절 공원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있다. 순간 나는 하늘이 바닥이고 내 몸이 엄청 높은 곳에 매달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떨어질 것만 같아 겁에 질려 속이 울렁거렸다. 나 자신이 하늘바닥에서 땅바닥으로 날아 천장에 붙어있는 불완전한 존재 같았다.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를 당기는 것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중력의 당김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 중력을 '당김'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너무 매정하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는 나를 지난 긴 선분이 이어진다. 선분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있지만 이미 그어진 선분의 시작점과 끝점이 어디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나는 바다바닥을 향해 내려앉는다. 내려앉는 것은 마치 바다바닥으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에 비친 윤슬을 쫓아 헤엄치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바다바닥을 찍고 다시 하늘바닥으로 날았다가 여기저기 해수면을 유랑하며 그저 존재하고 있다. 각자의 정의에 따라 열심히 노를 젓고 헤엄치는 것이 정답인 양 살아간다.
나는 바다를 녹색으로 그렸다가 회색으로 칠했다가 풍덩 하고 잠수해 본다. 끝없이 올라간다. 심해는 어둡고 바다바닥이 높다. 가라앉고, 떠오르고, 그저 좌표 한 지점에 찰나처럼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삽화: ChatGPT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