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커피를 한 잔 했던 그날이 기억나나요? 우리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날의 나는 잠을 푹 잤던 덕분인지 평온했고, 머릿속은 오후에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오랜만에 만난 당신이 반가웠으나... 당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따라 왠지 미묘하게 어두운 당신의 표정을 보며, 제가 지나가듯 안부를 물었으나 당신은 빈 미소만 지으며 별 대답하지 않았지요. 더 이상 구체적으로 물어보지는 못했던 이유를 이제야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저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타인과의 거리를 함부로 추정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건방지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어, 분명 같은 거리임에도 때로는 상대를 멀리, 때로는 가까이 가늠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경험할수록 삶을 판단하는 방식도 유연성을 잃어 고착화됨을 느낍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들 조금씩은 별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쉽고 편한 방식이니까요.
인생을 1인칭으로 관찰하면서, 일상의 관계와 현상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모든 주변정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들, 결국 최종 판단은 나의 몫입니다. 그러니 그냥 처음부터 내 방식대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긴 합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관계의 거리를 잴 수 있는 줄자나, 어긋남을 견주어볼 각도기조차 없습니다. 그렇기에 상대에 대한 판단할 때 직관과 눈대중에 더 의존하게 됩니다.
제게 객관적이고 사실에 가깝게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누군가에게 감정에 휩쓸려 갑자기 성을 낸다거나, 부담스럽게 친한 척하고 나서 이불킥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만나 다시 공감합니다. 그렇게 G, 당신과의 티타임도 제법 시간이 지나 당신과 나는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밤하늘 먼 곳의 별처럼, 고갤 들고 시간을 맞춰 겨우 보려면 볼 수 있겠으나 그러지 못하는 어떠한 것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날 용기를 내어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표정이 왜 어두웠는지, 힘든 것은 없었는지. 어쩌면 그 이후에 돌아올 대답을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닌가, 하고 나의 비겁함에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위치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떤 좌표 (X, Y)에 있음을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당신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멀리 한 발자국 디딜 용기가 필요했음을 이제 조금 깨닫습니다. 한 발짝 디디고 또 디디고 헛디디고 또 디디고 했다면 서로의 경계가 분명해졌겠지요. 그렇게 마지막에는 선이 명확하여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순간이 오더라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난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으므로 어떤 의미로는 더욱 견고할 것이라 믿어 봅니다.
다음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달달한 휘낭시에도 하나 대접하려 합니다. (근처 맛집을 알아두었습니다ㅎㅎ) 혹시 당신의 표정이 어둡다면 기꺼이 당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물론 더 이상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구김 없이 평온한 나날을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