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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든 Feb 19. 2023

10가지 요리를 동시에 시도해 반쯤 성공한 경험

내 에너지가 무한할 줄 알았지만 : 관계의 tradeoff

 수년 전이었다. 주말에 집으로 손님이 여럿 와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당시 백종원 아저씨를 보며 한참 요리에 꽂혀 있었던 나는, 야심 차게도 배달음식 없이 손님상을 직접 만들어 보이겠다는 선포를 했다. '짜잔' 하고 내가 만든 요리를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 '우와~ 이걸 알제이 네가 다 했어? 대박!' 하고 사람들이 엄지척하는 장면을 기대하며 심혈을 기울여 요리를 선정하고 재료를 준비했다. 이윽고 약속 당일이 되었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히 요리를 시작했다.


 문제는 계획한 메뉴가 무채쌈, 단호박찜, 차돌박이 숙주볶음, 오리고기구이, 샐러드, 대하구이, 그리고 고추장찌개였나? 더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10가지에 육박한다는 사실이었다. 쉬는 틈 없이 오전 내내 시간을 쏟아 열과 성을 다해 요리에 임했다. 재료를 썰고 찌고 볶고 간을 보고 또 다음 요리를 시작했다. 한 번에 3~4개 요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내 인생에서 기억나는 가장 치열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레시피를 보다가 고기가 타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고, 다음 요리의 차례가 생각나 다시 냉장고를 열고 깜빡하고 안 사온 재료가 있어서 멘붕이 오고... 그렇게 한참 요리에 빠져 있다가 퍼뜩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약속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는 아직 절반밖에 완성되지 않았다. 요리고 손님이고 자시고 모르겠고 그냥 힘들었다. 배달음식으로 준비할 걸 굳이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시간이 되어 손님들이 도착할 때쯤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고, 결국 몇 가지 요리는 완성하지 못한 채 요리상을 차렸다. 손님들은 나의 가상한 노력을 높이 사 주었고 입을 모아 맛있다고 칭찬해 주었으나, 내심 요리왕 비룡에 나오는 그런 리액션을 살짝 기대했던 나는 조금 실망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손님들이 100% 감동받은 표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표정만 보면 대충 알지 않나.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나는 정말 대체 진심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양심은 있었던 걸까...


 아무튼 그렇게 그날의 점심식사는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음식 양이 좀 부족하다고 하여 오후에 피자를 시켜 먹었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손님들이 간 후 긴장이 풀린 나는 2시간인가 늦은 낮잠을 잔 후 남은 재료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정리에만 3~4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날 10가지 요리를 동시에 시도한 경험을 자평하자면 50점 정도를 주고 싶다. 요리만 따지고 보면 7개? 8개? 정도를 성공하였으나, 손님들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양도 부족했다. 어떤 요리 재료는 너무 많이 사서 한가득 남았고 어떤 재료는 모자랐다.


 반 쪽짜리 성공이다. 반 쪽짜리 성공은 반 쪽짜리 실패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날 얻은 교훈을 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조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다.

그러나 나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 수준을 인식하자.

특히 처음 해보는 요리를 시도할 때는, 실수하거나 헤맬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자.




 요즘의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닌다. HR 담당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회사를 옮긴 지난 몇 년간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며 다양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을 압축적으로 하였다.


 사람을 대하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내가 타인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유한함을 깨닫는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관심을 주기, 공감해 주기, 위로하기, 그렇게 잠시나마 상대방의 일상이라는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 참여하는 조연이 되기 위 말, 행동 하나하나 나로 하여금 에너지를 쓰게 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생각보다 금방 고갈되어 재충전하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늘 일정표에 그득그득한 약속들에 뜨악하다가, 문득 수년 전 무리하게 요리에 욕심을 내었던 그날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리를 통해 얻은 그날의 교훈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조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다.
= 내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간 또한 유한하다. 저녁 약속을 아무리 많이 잡아 봐야 1년에 최대 365일이다. 나의 인맥을 1,000명 2,000명 넓힐 수도 없고 만약 넓힌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나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 수준을 인식하자.

=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관계가 좋을 수만은 없다. 그러니, 내가 감당 가능한 인간관계의 범위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처음 해보는 요리를 시도할 때는, 실수하거나 헤맬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자.

= 새롭게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이거나, 코드가 잘 맞을 수는 없다.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는 서로가 과감하게 차이점을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시간 속에서 유한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유한한 에너지를 갖고.


 간혹 정말 절실한 상황이 닥쳐, 조금 더 쥐어짤 수는 있을지 모른다. 평소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이라 하면, 노력에 따라 괴력(?)을 발휘하여 150을 억지로 쓸 수도 있겠으나, 500, 1,000을 쓰기는 어렵거니와 가능하다 하더라도 단발적이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또는 절실하여 최선을 다하는 관계가 상대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하여, 항상 기대한 또는 유효한 결과를 담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분배하고자 노력했다. 감당하기 어렵거나 힘든 자리는 피한다. 계속되기 어려움이 예상되는 관계에는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다. 즐거워 다음 만남을 기대했던 사람에게조차, 다른 곳에서 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만남을 피한다.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덜 써도 되는, 편한 사람들만 만나는 경향이 생긴다. 꼭 나만 럴까. 아마도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 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이러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관계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 상호절충)하는 속성이 있다. 갑분 영어용어를 꺼냈는데, 이 단어만큼 오늘 내가 하려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트레이드오프는 상호 간의 절충, 상충을 의미한다.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tradeoff : 두 가지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려 하면 다른 하나의 목표 달성이 저해받는 상태 또는 관계

 

 다시 말해 tradeoff는 일과 여가생활의 상충관계 같은 것이다. 회사에 진심이고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의 여가활동이나 취미, 가족, 회사밖의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침해받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를 이루려 하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침해받는 관계다. tradeoff는 인간관계의 여러 장면에서 마주할 수 있다. A와의 관계에 집중하면 B에게는 소홀해진다. 타인과의 관계에 에너지를 쏟으면 나와 마주할 시간이 줄어든다.


그래서 요즘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을 좇으며 살아간다.




  한 때 나는 내 에너지가 무한할 줄 알았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가 가진 에너지는 유한하여, 커버할 수 있는 인간관계 또한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tradeoff 하고 있었다. 가끔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이던 나날을 돌이켜보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거나 다른 곳의 결핍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모든 요리를 한 번에 다 하려는 욕심 버려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본다. 대신 우선순위가 높고 내가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성질의 관계에 조금 더 집중하려 한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관계의 기초를 다져야겠다. 선택하지 못한 길에 아쉬워하지 않고, 가진 것과 현재에 집중하다 보면 지속가능하고 선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들이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작은 욕심을 남겨두려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 하여 새로운 시도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까워지기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여 지레 포기할만한 관계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끈기, 용기, 또는 순수함 같은 어떤 것.


 그리고 가끔 무리하더라도 150의 에너지를 써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열정도.


 혹시 누군가가 진심을 담아 관계의 tradeoff 따위는 무시하고 기꺼이 내게 150의 에너지를 써 준다면, 그 진심을 인식하고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까지.


 그래 뭐, 정답이 어디 있을까. 무리하여 10가지 요리를 시도했던 그날의 경험이 지나고 보면 삶의 한 에피소드로 즐거운 추억이 될 수 있듯이, 우리가 때로 크고 작은 실패에 부닥치더라도 경험하는 것 그 자체로 좋은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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