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형 인간]
오래간만에 핸드폰을 바꿨다. 오랫동안 쓰던 A기종에서 B기종으로 옮겨 탔는데, 특별한 이유나 불편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발적(?)으로 갈아탄 것이다. 이는 내게 너무나 큰 변화다. 15년가량 한 회사의 시스템으로 꾸려진 IT 생태계가 다른 회사의 생태계로 바뀌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간과한 것은 15년이 제법 긴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휴대폰을 바꾼 후 1주일가량 잡다한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우고 백업하며 새로운 생태계로 이주를 진행했다. 마치 화성을 테라포밍하고 이주하게 된 지구인이 된 느낌이었다. 특히, 호환이 안 되는 메모장의 잡다한 메모들 (팀원 커피 주문을 받은 '아아 2, 따라 1'라든지 쇼핑몰 'B32구역 주차' 같은 메모들을 포함하여)을 하나씩 확인하고 지우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왜 나는 왜 굳이 잘 쓰던 핸드폰을 바꾼 걸까 하는 자책이 피크에 이르렀을 때 즈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리셋형 인간'이었다!
나, 다시 말해 리셋형 인간은 무엇이든 다 리셋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습관이나 생활방식, 심지어 인간관계까지도 내가 원하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180도 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리셋 성향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또는 불편함이 있을 때 발동 확률이 배가된다. 무언가를 확 바꾸면 풀릴 수 있을 거라 믿게 되는 순간, 과감하게 리셋버튼을 눌러버린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직업, 새로운 습관으로 옮겨 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쉽냐 하면, 물론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리셋의 효과가 줄어들고 반발력은 커진다. 두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바꿀 수 있다지만, 시간이 지나 고착화될수록 삶의 방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재창조를 위한 엄청난 에너지와 고통이 수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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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만한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은 안되지만 나는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리셋 버튼만 눌러주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 오만함이다.
리셋이 순간적인 일탈로 귀결되는 경우도 많다. 급하게 자동차 핸들을 꺾으면 넘어지기 마련이다. 당장 내일부터 아침 달리기를 하겠다는 결심은 하루도 지켜내기 힘들뿐더러 한 달, 100일, 1년 이어가기는 더 힘들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긴 시간과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리셋형 성향이 그동안 인생에서 꼭 나쁜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바꾸기 힘들었던 나쁜 습관들을 리셋하듯 고친 기억도 많으니까. 한번 큰 충격을 주지 않으면 바뀌는 계기가 생기지 않는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바꾼 핸드폰도 지금은 잘 적응해서, 만족하며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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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도 리셋 버튼이 있다. 나만 바뀌면 되는 영역에서야 리셋형인간이 빛을 발할 때가 있겠지만, 타인이 엮인 인간관계에서 리셋이라는 것은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관련해서도 한번 글을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