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 시나리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O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O는 배우였다. 엄청 잘 나가는 배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데뷔 초부터 천천히,소소한 역으로 시작해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배우였다. 아역배우부터 시작해서 엑스트라, 조연, 대역 등 안 해본 게 없었다. 그렇게 이곳저곳 다니며 촬영하다보니 인맥도 쌓이고 점차 커리어도 쌓였다. 그렇게 절실한 노력 끝에 O는 그토록 바라던 배우라는 꿈을 제대로 이루었다.
이번에 촬영한 드라마는 O가 여주인공인 로맨스 스릴러 영화였다. 공포지만 좀비가 나온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귀신을 보는 남주인공과 귀신인 여주인공의 러브 스토리이다.
귀신과 일반인의 연애라면 흔하고, 로맨스인데 왜 스릴러냐고들 하겠지만 이번 드라마는 조금 달랐다.
귀신인 여주인공의 과거 에피소드 때문에 조금 잔인한 장면이 많은 드라마였다. 처음엔 '스릴러' 때문에 거절하려 했으나 여주인공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외모가 너무 O의 롤모델과 똑같아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 역을 무조건 연기해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장르가 판타지다 보니 촬영하면서 꽤 애를 먹었다. 처음 연기해보는 것도 너무 많았고 대사 중 작가가 만든 단어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힘들었던 만큼 촬영 중 제일 재미있던 드라마였다.
처음으로 공중촬영, 수중촬영까지 해보고 라인업도 놀라웠으며 원래 존경하던 가수가 불러주는 OST라니 싫어할 수가 없는 드라마였다.
그렇게 장장 1년 3개월간의 길었던 촬영이 끝을 맺고 몇 개월간의 기다림 끝에 꼬박꼬박 본방사수도 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1년 3개월. 꽤나 긴 시간이다. 다른 드라마 촬영 기간보다 긴 편에 속한다. 확실히 판타지다 보니 연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였고 다양한 곳에서 찍었기에 이동도 많았다. 세트 짓는데만 돈이 꽤나 들었을 거다. 물론 돈고 시간을 들인만큼 드라마가 잘 되긴 했다. 잘 됬다고 하기에는 조금 찔리는 성적이지만. 돈과 시간을 들인것보다 조금 낮은 결과가 나왔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O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 노력이 시청률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 노력이 수익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단지 O가 열심히 촬영한만큼의 결과물. 그거면 됐다. 누군가가 드라마를 보고 좋아했으면 그만인 거였고, O가 찍은만큼 나왔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버리는 것 같았다.
매일아침 뉴스 기사를 읽는 습관을 가진 O는 오늘 아침도 모처럼 기분 좋게 일어났건만 참혹한 기사를 읽었다. 7일 뒤에 세상이 종말한다는, 정확히는 인류가 종말한다는 기사. 그 소식에 O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후 7일 뒤가 대망의 마지막화 방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마 가장 중요한 화인 마지막화를 아무도 보지 않게 되겠지? 설마 저녁 9시에 방영하는데 그전에 종말하진 않겠지?
O는 절망감에 휩싸이며 아침 요가를 했다. 새로 찍게 된 드라마도 준비중이었는데 아무 소용없나. 아, 이번 대본 정말 재밌었는데... 시끄러운 O의 머릿속과는 다르게 외적으로는 잔잔한 노랫소리와 요가를 하는 O 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놀라우리만치 예쁜 하늘도. 오늘의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렀고 구름도 새하얬다. 확실히 종말 7일전의 모습 같진 않았다.
아마 종말 7일간 총 두 편이 방영될 것이었다. 마지막화 앞 화와 마지막화. 확실히 마지막화 앞 화는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말 6일 째 저녁 8시에 올라오니까 여유가 있을거고, 잘하면 마지막화도 볼 순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볼 수 있다한들 보는 사람이 있을까? 몇 시간 뒤에, 아니 언제 종말할 지 모르는데 한가하게 드라마나 보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이 그즈음 다다랐을 때 요가 시간이 끝난 알림이 울렸다. O는 마지막으로 스트레칭을 한 뒤 일어서 요가매트를 돌돌 말았다. O는 요가매트를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둔 뒤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사과 한 개를 꺼내 깍으며 O는 생각했다.
마지막 화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많지 않았나? 여주인공의 성격이 가장 잘 보이는 화가 마지막 화였다. 이제 막 과거 에피소드가 끝나고 다시 본격적인 내용으로 돌아왔는데 제일 중요한 마지막 화를 못 보다니. 드라마의 팬들이 불쌍했다. 회사에서 별다른 연락이 있으려나? 두개를 몰아서 방영을 한다거나 빨리 한다거나...
O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과 깎기를 끝냈다. O는 다 깎아진 사과를 여덟 등분을 해 한 조각은 입에 넣은 뒤 나머지 일곱 조각을 모두 믹서기에 넣었다. 믹서기가 소음을 만들어내며 위태롭게 사과를 갈았다. 그사이 O가 먹은 한조각의 사과는 달콤한 맛을 뽐내며 아삭거렸다.
O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믹서기를 내버려둔채 대본을 찾으러 갔다. 방 안 책장에 꽃힌 대본이 눈에 보였다. 화별로 나눠진 꽤 많은 대본들 중 O는 마지막 화 대본을 꺼내 첫페이지를 사락 넘겼다. 자신의 파트에 쳐둔 형광펜 표시와 중요한 부분의 동그라미들, 소소한 메모들이 보였다.
O는 대본을 읽으며 천천히 거실로 나갔다. 거실로 나오자 시끄럽던 믹서기는 이미 멈춰있었다. O는 대본을 내려놓은채 믹서기로 향했다. 부드럽게, 조금의 조각들을 포함한 갈린 사과가 보였다. O는 잠깐 말없이 그 사과를 바라보다가, 투명한 유리잔에 사과를 부었다.
O는 사과가 부어진 컵을 든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대본을 손에 들었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빼곡한 글자들은 O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내 O는 소파에 기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가라앉아있던 생각들이 너도나도 위로 치솟았다.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이리저리 둘러보고, 버릴 수 없이 차곡차곡 배에 쌓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배는 너무 무거워졌다. 가라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르고 계속 생각을 건지다가 어느새 발에 물이 닿아 정신을 차렸다. 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O는 대본과 사과가 든 컵을 탁자에 내팽겨쳐둔 채 소파에 누워 TV를 틀었다. 볼 것 없어 하염없이 채널을 돌리던 와중 화면 속의 O를 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조금 오래 본다면 '쟤 누구지? 연기 좀 하는데?' 싶을 법한 수준의 연기였다. 화면 속 O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리자 O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흠칫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드라마를 몰입해서 보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화면 속에 시선을 고정한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돌아 누워 머리를 짚었다. 드라마를 보다보니 가라앉았던 배가 다시 떠올랐고, 생각들도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별다른 생각없이 남은 7일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차라리 드라마를 안 찍었더라면 편했을까. 어차피 드라마가 떠봤자 끝날건데.
O는 한참을 머리를 짚은채 누워있었다. 별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생각을 날려버리는 연습도 해보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드라마에서는 리얼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고 중간중간 광고들이 나왔다.
그러다 O는 손을 땠다. 드라마의 엔딩 장면이 나오고 아래로는 엔딩 크래딧이 짧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생각할 힘도 없을 정도로 생각에 힘을 써버린 뒤였다. 생각 날려버리기도, 긍정적인 생각하기도, 자기 합리화도 모두 실패한 뒤였다.
O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게 TV 속 광고를 바라보았다. 쌓여있던 스트레스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눈의 피로감이 더해졌다. TV에서 나오는 소리, 정보, 내용 모두 다 머리속을 거치지 않고 흘러지나갔다. 방금 무슨 광고가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방치된 사과가 떠올랐고 O는 몸을 일으켜 컵을 잡았다.
그때 O의 눈에 밑줄이 잔뜩 쳐져있고, 곳곳에 메모가 되어있는 대본이 보였다. O는 멍하니 그 대본을 바라보았다. TV에서는 O의 잔잔하면서도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생각해보면 고작 마지막화를 제대로 방영하지 못한다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촬영하는 동안 행복했고, 좋아하는 일을 했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었다. 그거면 되는 거였다.
O는 너무 많은 걸 바랬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성공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