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의 종말 17화

P의 종말

7일간의 비행

by 이시절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P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처음엔 귀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던 비행기의 소음도 어느새 익숙해져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양손으로 의자를 잡지 않으면 걸을 수 없던 기울어진 비행기의 통로도 어느새 공손하게 손을 모은채 걸을 수 있었다.


P는 일한 지 4년 조금 넘어가는 승무원이었다. 비즈니스나 퍼스트는 부담스러워 한 번도 한 적은 없고, 진상이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눈치 볼 필요는 거의 없는 이코노미를 맡았다.

P는 키가 164cm로 승무원치고는 꽤 작은 편에 속했다. 보통 항공사에서 선호하는 키가 기본적으로 168cm 이상이었기에 유명한 항공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P의 키는 선반에 겨우 손 전체가 닿는 정도였다. 소형 비행기의 경우 손목 아래까지 닿였고, 대형 비행기의 경우 손이 아슬아슬하게 조금 닿았다. (그래서 대형 비행기는 탈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타면 늘 하는 선반이 닫혔는지 확인하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찾아오는 승객의 짐 꺼내주기 임무는 정말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승객이 짐을 꺼내달라는데 '키가 작아서 팔이 안 닿습니다 승객님'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4년 넘게 근무하며 P가 찾아낸 승무원의 거의 유일한 장점은, 어쩔 수 없이 힘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는 다양한 돌발상황에 대처하고 성인 한 명 정도는 들거나 제압할 수 있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P가 근무하며 그런 일은 딱 한 번 있었다. 2년 전, 비행 공포증이 있는 승객을 만났을 때.


공항 카페, P는 승무원 동기인 현화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3시간 뒤에 비행이라 준비는 미리 끝내놓고 오랜만에 수다나 잔뜩 떨 생각이었다.

"아, 종말 소식 들었지? 진짜 대박이야..."

"그니까! 진짜 억울해! 종말 6일 남았는데 비행이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우리 좀 비참하지 않니?"

현화의 말에 P가 조금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P는 반정도는 믿고 반정도는 불신이었기에 딱히 생각이 없었다. 설마 그러겠어? 싶었다.

"이번 달 로스터 (승무원들의 1달 스케줄) 보자마자 완전 멘붕 오던데 그거 하나정도는 좋다."

P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솔직히 종말 같은 건 거의 믿지도 않았기에 딱히 불아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다.

"왜? 더블섹터 (비행 후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다시 오는 것을 하루에 두 번 하는 것.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다.) 있었어?"

P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손가락으로 3을 만들어 보였다.

"3개."

"헐... 이번 달 다했으면 살아남지도 못했겠네."

"내 말이. 레이오버 (비행 후 도착지에 머물렀다 돌아오는 것)에 가고 싶었던 동남아 나라 많아서 좋긴 했는데, 나머진 완전 내 체력으로는..."

P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현화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비행에서 난동 피우는 승객 많을 것 같은데. 다들 빨리 가고 싶어 할 거 아냐."

현화가 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P는 잠깐 고민하다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대꾸했다.

"하긴. 그래도 난동 피워봤자지. 어차피 승무원 언니들한테 못 이겨~"

P의 말에 현화가 까르르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현화에겐 가볍게 느껴졌다.

"나 이번에 새로 헬스장 가입했는데, 왜 이렇게 잘하냐고 엄청 놀라시는 거 있지. 우리가 좀 보기엔 여리게 생겼잖아?"

현화가 꽃받침을 하며 말했다. 현화는 딱 보기에도 여리고 선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늘 로우번으로 묶고 있는 고동색 머리카락과 단정한 옷, 호리호리한 몸매까지 전혀 세 보이지 않았다.

현화의 말에 P가 맞장구쳤다.

"그렇긴 하지. 이런 얼굴인데 그렇게 운동 잘할 줄 누가 알았겠어."

"승무원들은 길 가다가 납치당할 일은 없을 걸."


일상적이고 장난스러운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있었다. 현화는 컵을 반납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곧 비행이야. 오늘 어디지? 그... 약 다섯 글자 정도의..."

"아이슬란드?"

"맞네, 딱 다섯 글자."

현화의 말에 P가 손을 딱 치며 대꾸했다. 현화는 까르르 웃으며 짐을 챙겨 카페를 나갔다. P는 현화를 따라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이번 경유지 파리인가? 와, 파리 직항만 해도 14시간 이상인데..."

P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슬란드는 직항이 불가능한 곳이었고, 경유를 해도 최소 20시간 이상이었다. 파리에 도착하고 아마 하루정도의 휴식시간 뒤에 바로 비행을 할 것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 거의 없는데. 그냥 파리 갔다가 바로 돌아오는 날이 많지."

"... 그게 더 힘들지 않아? 14시간 비행하고 이틀 뒤 또 14시간 비행이잖아."

"그런가."

현화가 살짝 웃으며 게이트로 들어갔다. 먼저 도착해 있던 후배 승무원들이 인사했다.

"현화 오늘 비즈니스석?"

"어. 선배들 다 도망가서 승무원도 몇 명 없는 상태야. 오늘 비즈니스석 만석이야. 다들 죽기 전 비스니스석 타고 싶나 봐."

현화가 짜증 난다는 듯 대꾸했다. 늘 긍정적이고 매사 괜찮다고 해주는 현화도 비즈니스석은 싫어했다. 원래 비즈니스석은 선배 승무원들이 맡았지만 절반이상이 도망간 지금 상황에서는 선후배 나눌 것 없이 맡아야 했다. 심지어 대부분의 승객이 비즈니스석을 원했기에 비즈니스석은 아예 만석이었고, 오히려 이코노미석이 여유로웠다. P는 현화가 안타까웠지만 내심 자신은 이코노미석인 것에 안도했다.


P와 현화는 승객들이 타기보다 몇십 분 가량 빠르게 비행기에 타서 내부를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청소했다. 오랜만에 대형 비행기라 어색했다. 늘 타던 소형 비행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통로가 넓었고 발끝을 들어야 선반에 손이 닿았다.

비즈니스석은 빈자리가 없었고, 이코노미석은 두세 자리 정도 비어있었다. P는 마지막으로 전부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승객들이 하나둘씩 타기 시작하고, P와 현화는 기계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티켓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티켓 확인 도와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좋은 비행되세요."

족히 200넘은 훨씬 넘는 승객들의 티켓을 확인하고, 똑같은 말만 반복하니 그것만으로도 지쳤다. 몇 년 했더니 또 감이 생겨서 '이제 슬슬 끝나겠다' 싶으면 정말 곧 끝이 났다. 비행시간이 되자 문을 닫고 승객들을 확인한 뒤, 안내방송에 따라 구명용품 착용법을 설명했다. 처음 왔을 땐 어설퍼서 몇 번 실수하기도 하고 내려놓고 잘못 들기도 하고 실수가 많았지만 이젠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P는 빠르게 안내방송용 구명용품을 정리하고 선반을 확인했다. 좀 큰 편에 속하는 비행기라 발끝을 들어야 손이 살짝살짝 닿았고, 양손을 힘줘서 눌려야 제대로 닫을 수 있었다. 차마 손님들이 가방을 넣어달라거나 꺼내달라는 부탁을 할까 봐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걸었다.


안내방송이 끝나고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알림이 들리자 P도 점프싯 (승무원용 객석)에 앉았다. 목에 맨 조그마한 스카프의 각도를 조절하고 옷 주름을 폈다. 승무원 유니폼은 앉아있든 서있든 불편한 건 다름없었다. 품이 좁은 치마는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고, 목 끝까지 오는 깃은 목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P는 스카프를 조금이나마 느슨하게 만들며 의자에 기댔다.


비행이 절반정도 지났을 때 즈음, P와 현화는 겔리 (비행기 내부에 있는 부엌)에서 다시 만났다. 현화는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승객 진짜 많지?"

P가 기내식을 준비하며 말했다. 현화는 기내식을 준비하며 손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오늘따라 치마가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 나만 그래?"

"헐, 나도. 걸을 때 원래 이렇게 불편했나."

현화가 기내식을 마저 준비하고 음료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그니까. 통로는 오지게 좁고, 걷기는 불편하고 비행기는 흔들리고, 완전 악조건이잖아."

"심지어 더 문제인 거."

"뭔데?"

P가 고개를 획 돌려 현화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방사능. 나 그 얘기 듣고 승무원 그만둘 뻔했어."

"헐, 나도.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면 암까지 걸릴 수 있다는데."

현화가 우울하게 말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두려운 건 역시 방사능 노출이었다.

"승무원은 최악의 직업이야. 다리 짧아 보이고 허리 길어 보이는 유니폼이라니. 아, 우리 회사가 문젠가?"

P의 말에 현화가 까르르 웃으며 P를 살짝 쳤다.

"그런 걸지도? 우리 회사만 좀 그런 거 같기도 해."

"그렇지? 확실히 그래."

둘은 까르르 웃으며 각자 기내식을 마저 준비했다. 오늘따라 더욱 지루했다.

"그래도 승무원 장점이 있긴 하지."

현화가 음료 뚜껑을 닫으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있어?"

"있지, 그럼."

"뭔데?"

현화가 진지한 목소리로 P의 귀에 속삭였다.

"일 년에 여행 엄청 많이 가고, 남들이 보기엔 유니폼 예뻐 보이고, 강제적으로 힘이 세지고, 그리고..."

"그리고... 승무원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정말 단아하고 예쁜 이미지야."

"확실히 그렇지?"

P의 말에 현화가 까르르 웃었다. 현화는 웃으며 카트에 기내식을 실었다. 그러다 문득 카트 손잡이를 잡고 멍하니 창 밖 새하얀 하늘을 보았다.

"종말일 때면 우린 아이슬란드겠네?"

아마 파리에 내일 도착하면 이틀간 레이오버가 있을 것이고, 또 아이슬란드행 비행기를 타면 하루가 지날 거다. 아마 아이슬란드에서도 이틀간 레이오버가 주어질 거니까, 7일 뒤 종말이면 아이슬란드에 있을 것이었다.

"아이슬란드 어디가 유명하지? 유명한 데서 죽으면 좋을 것 같은데."

P도 기내식을 카트에 실으며 말했다. 현화는 기내식 개수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너무 유명한 데면 사람 엄청 몰릴 것 같은데. 안 유명한데 우리만 아는 좋은 곳 있으면 좋겠다."

"그런가... 진짜 사람 별로 없는데 끝내주게 예쁜데 있으면 좋겠다! 감성적이고."

P가 기내식 개수를 세는 동안 현화는 확인을 마치고 카트를 끌며 겔리에서 나갔다. 현화는 겔리에서 나가며 흘리듯 농담을 던졌다.

"솔로 크리스마스에 이어 솔로 종말이라니 아쉽네. 6일 만에 남자 친구 만드는 방법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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