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떫음 Jul 19. 2022

썩어빠진 글쓰기

떫소리_2021. 5. 8

외롭다. 외로워서 글을 쓴다.

 

지난 번 일기에선 심심하다는 이유로 글을 쓴다 언급한 적이 있다. 멀뚱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문득 그게 아닌 것 같아 노트북을 켰다. 심심하다며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거나, 사족을 못 쓸 때 그것은 외로움이 분명했다. 나는 심심해서 글을 썼다기 보단 외로움을 통해 느껴지는 고독을 잠깐이나마 애써 ‘심심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변화시켜보았을 뿐인 거다.

그렇다. 외롭다.

무지막지하게도 고독을 타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 온다기 보단, 사실 평상시에도 늘 존재했지만 이렇게 완벽히 혼자가 되는 순간 그 감정이 버젓이 드러나고 만다. 나에겐 애인이 없다. 옆구리가 시리다는 둥, 그런 류의 외로움이 전혀 아니었다. 물론 애인이 생기면 좋을 것이다. 허나 지금 나의 상태로서는 ‘애인’이라는 개념은 그저 겉으로 표현하는, 육체적 관계를 풀 수 있는 하나의 용도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그 상대방에게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무례한 관념이다.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그래, 지금 그러고 있는 게 나 자신이다.

불현 듯 또 다시 내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단지 외로워서일까?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물음표들을 내던지고 있었다. 명확하게 마침표와 함께 정리되는 개념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끽해야 쉼표를 들고 나타나 그 뒤를 끝맺지 못하고 있는 개념들도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뇌에 과부하가 다가온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나는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가 무얼 하려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당황부터 하고 본다.

몇 발짝 되지도 않는 원룸을 걱정 가득한 발걸음으로 빙글빙글 돌아본다. 그러다 힘없이 주저앉는다. 이런 반응조차도 지금의 나에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운다. 또 울어버린다. 내가 우울하면 남들에게도 우울이 전파된다며 항상 웃고 다녔던 예전의 나는 지금 없다. 그렇다고 이 우울을 전파하는 것조차도 두려움으로 자리 잡았다. 이럴 때마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핸드폰을 들여다만 볼 뿐, 연락하지 않는다.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하는, 이 마음조차도 울적한 감성에서 나오는 거짓일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마음을 썩어 문드러지듯 긁으며 눈물이 나오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려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냅다 끌어온다. 보게 되면 눈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짧은 영상들을 어둠 속에서 본다. 그럼 끅끅대며 울게 된다. 영상의 내용은 내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유튜브처럼 짧은 영상에는 흥미가 없다. 잘 보지도 않는다. 영화처럼 서사부터 시작하는 하나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면 감동이라거나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날에는 운다.

어쩌면 같이 울어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연락처를 보다가 실수로 전화를 할까봐 손가락을 떤다. 그렇게 연락처들만 켜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일부러 한 줄기의 달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해놓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멍하니 환한 불빛의 핸드폰을 우물 아래를 보듯 내려다보기만 하고 있다. 누가 제발 나에게 연락을 줘. 그럼 난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순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이러다 진짜로 누군가가 전화가 오면 그게 또 무서워서 피할 지도 몰랐다.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사무치는 감정이 폭발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못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소심하게, 내가 하던 짓도 아니면서 몇 군데에 대뜸 뭐하냐고 문자를 넣는다.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바로 답해주는 소중한 이들. 그들의 답장에 또 멈춰서, 보지도 않는다. 미친년. 그 순간 나는 나를 그렇게 불러본다. 친구들이 흔히 말하는 ‘감정 쓰레기통’ 대하듯 취급한다는 사람이 나일지도 몰랐다. 점점 그게 나인 것처럼 변해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친구 없이는 못 산다. 그게 누구든, 주변에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느 새 부턴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 걸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한창 나의 이런 모든 감정들을 스스로도 외면하고자 할 때는, 역시나 깨우치지 못해 하루에 몇 번 씩이나 약속을 잡을 정도로 바쁘게 놀았다. 친구는 아직까지도 내가 그랬던 것을 ‘문어발 약속’이라 부른다.

하필 또 그 단어에 의미부여를 하고 앉았다. 문어발은 어쨌거나 콘센트에 가득 꼽혀선 곳곳으로 전기를 전달하는 모습이 아닌가. 난 그렇게 누군가들을 만나며 내 에너지를 충족시킨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 와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더 깎아먹기도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추억들을 잃고 싶진 않다.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사람들을 사랑했었던 시절의 ‘나’이니까.

모르겠다. 역시나 전혀 모르겠다.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고, 정확히 무슨 감정을 달고 있는 것이며, 나 자신에게든 다른 이들에게든 무엇을 바라는 것이고, 그렇게 끊임없는 걱정만 주렁주렁 달면서 그 모빌 같은 장식들이 못 버텨내곤 후두둑하고 떨어질 때 함께주저 앉아버린다. 여유가 없다. 내 마음에는 여유가 있을 자리도, 시간도 없다. 그렇게나 자책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들 하지만, 내 스스로 목을 꽉 조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더 정신을 못 차릴 거란 걸 나는 안다. 채찍을 때리기 보단 아예 칼을 들고 위협을 하는 편이 나에겐 더 효율성을 늘리는 방법이었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며 벌여놓은 짓들에 나는 그렇게나 자주 무너졌다가도 다시 반복한다. 이게 무슨 삶이며,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난 결코 고독한 늑대 한 마리에도 취급당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괴상한 길고양이랄까. 남들에겐 긍정을 전파하면서 막상 제대로 나에게 붙으려 할 때는 조심스레 선을 긋는다. 그들에게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좋았던 순간이란 사료를 받아먹고는 홀라당 내빼버리기.

 

‘나’는 지금 정말,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정신차려보니 꾀죄죄하게 썩어서 부패하고 있는 ‘나’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타자를 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작가의 이전글 예전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