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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떫음 Jul 05. 2022

무의식에서 이어진 필름조각들(3)

떫소리_2022. 3. 29

6~7살 즈음이었다.


장난감 갖고 노는 남동생,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언니, TV보고 계신 아빠, 그리고 식사준비를 하고 계신 엄마. 책 읽거나 학습지를 풀고 있는 나.

그 사이에서 식사준비를 돕고 아빠가 시키시는 잔심부름은 전부 내가 도맡아 하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한 번은 모두가 앉아서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필요한 일은 내가 일어나서 하는 것도 당연했는데, 그 날만큼은 내 스스로가 이상하다 여겼나보다. 벌떡 일어나서 이 모든 상황에서 왜 내가 해야만 하느냐고 그 어린 나는 떵떵 소리 쳤다.


언니와 동생, 엄마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네가 만만하니까 그렇지, 라고 말하시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드셨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엄마는 밥 안 먹을 거면 치워라, 라고 하셨다. 그 장면 또한 내 머릿속 필름으로 선명히 남겨져있다.


사교육부터 작게나마 선물을 받곤 하는 것 까지도 나는 약간의 비교가 이뤄질 정도로 살았다.

가끔 그러다 아빠가 친척들과 술 한 잔을 하시면 주량이 약하시기 때문에 항상 먼저 안방에 따로 누워계신다. 지나가다 아빠를 마주치면 아빠는 나를 불러 옆에 같이 앉히셨고, 그럴 때마다 내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은 ‘아빠는 사실 니를 제일 믿는다. 그러니까 잘해라.’ 였다.

그럼 평소에 미워했던 마음부터 모든 게 사르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아빠가 날 좋아하시는구나. 사실은 모든 건 아니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다시 나는 열심히 가족을 사랑하며 나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그것도 어느 중간쯤 가다가 매번 그렇게 뒤에서 술김에 조용히 한 마디 해주며 내 마음을 풀어주는 게 괘씸하게 느껴졌고 때문에 나는 갈수록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작정 끝까지 끌고 가서 해결을 봤다.

친척들한테까지 똥고집이니 뭐니 독한 놈이라는 등 호칭을 들어도 그게 내 살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부모님이 반면교사로 롤모델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 정체성이 크게 확립되기 시작하는 고등학생 때는 입학부터 징하게도 부딪히기 시작했다.

새벽에 UCC촬영을 이유로 일찍 등교하면서 울면서 걸어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참다가 가끔 점심을 거를 때 교실에서 울음이 터져 위로와 격려를 한 아름 받기도 했다. 당시 내 얘기를 들어주고 다 같이 응원해줬던 수많은 반 친구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얼마나 든든한 내 편이었는지를.


진로를 위한 큰 결정을 하고 집에 돌아와 엄마를 앉혀놓고 진지하게 한 마디씩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던 날도 기억난다. 진지한 내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집안에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입을 열 때마다 벌벌 떨면서 울면서 얘기를 했다.


엄마는 어색했는지 내 침대에 앉아 날 쳐다보지도 않으시다가 울긴 왜 우냐? 고 한 마디 하시고는 내 얘기가 끝나자 나가셨다. 그게 끝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하셨다.


그 뒤로 학교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이랑 잠깐 맛있는 것 사먹고 논 다음 집에 들어가선 내 진로와 그를 위해 준비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자료 조사를 샅샅이 한 다음 정리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타당한 근거와 마지막으로 진실 된 편지까지 써서 문서를 만들어놓고 친구에게 부탁해 인쇄한 다음 파일에 넣어 완성한 후 주말 아침 일찍이 식탁 위에 펼쳐두곤 저녁까지 사라져 있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의견을 굳히기 위해 반항을 시작했던 날은 16쯤이었다.


그 나이 먹어서까지 엄마가 여기 다녀라 저기 다녀라 시키고 알아서 곧이 곧대로 학원을 다니는 부분에 이상함을 느끼면서 주도적으로 나와 맞는 교육을 알아볼테니 지원을 해달라고 했었다. 엄마는 알겠다고 하셨지만 단 한 치의 의논도 없이 대뜸 집에 돌아오니 얼굴을 본 지 5년은 된 동네 동창 남자애와 새 수학과외를 하나 등록했다고 하셨다. 별 수 있나 싶어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내 수준에선 진도부터 과제량까지 너무 과분했고 모든 게 갑작스러워 일주일을 다니고 이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해도 못한 원리로 되는대로 과제를 밤새도록 하다가 수업을 가고, 마치자마자 또 영어 과외로 향하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과외를 가는 길에 울면서 엄마에게 힘들다며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우선 영어 과외까지 갔다와서 얘기를 하자고 말하셔서 친구의 위로를 받으며 수업을 들으러 갔다.

자신감을 갖고 집에 돌아오니 웬일로 아무도 없었다. 배고파서 대충 주전부리를 주워 먹고 엄마를 기다렸다. 이후 동생이랑 화목하게 들어오셨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사촌친구가 오늘 생일이더랬다. 작은 이모를 포함해 다 같이 저녁식사로 뷔페를 다녀왔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웃으면서 일단 등록했으니 끝까지는 다니라고 한 마디하시고 모든 건 끝이났다. 나는 학원 가는 길에 울면서 했던 힘들다라는 말 한 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말 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나는 과제를 하지 않았고 A4용지 가득 그냥 내 의지에 대해서만 적어내려갔고 아침에 부모님이 밖을 나가시는 걸 확인한 후 편지를 내려놓고 집밖으로 나섰다.


나는 수업을 처음으로 학원수업을 들으러 가지 않았고 그날 밤 집에 들어가기까지 나는 핸드폰 전원을 꺼 뒀고, 그래도 무서워서 부모님이 맞벌이신 친구 집에 일찍부터 찾아가 하루종일 숨어있었다.


그 분들이 퇴근을 하시고 늦은 저녁시간쯤이 되니 밥을 얻어먹기까지 했다. 원래 그런 편한 사이였지만 너무 죄송해서 저녁까지 먹고 천천히 집을 향해 나섰다. 가는 길에 일부러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길을 돌아서 가면서까지 늦장을 부리다 조용히 들어갔다.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시다 내 소원대로 알아서 과외를 알아보라며 말씀하시곤 끝이 났다.


그러기로 해놓고도 한 번은 더 맞춤과외라며 선생님께서 집에 방문하시는 과외를 잡아놓고 내가 집에 오자마자 곧 선생님이 오실거다, 라는 말을 하곤 수업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거기서 나는 이성을 놓고 엄마보고 미쳤냐는 말을 해버렸다가 어디서 그런 말을 내뱉느냐고 혼나면서 쥐고 있던 핸드폰만 들고 그 상태 그대로 나는 집밖을 나가버렸다.


그 새로운 선생님이 오셔서 헛걸음을 하시든 말든 상관 않았다.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 이곳저곳 산책이나 하며 떠돌다 친구를 불러서 하소연하다가 친구도 집에 들어갔다. 12시에 들어온다는 건 당시 말이 안됐지만 그때까지 버티다가 집에 조용히 들어가서 잠들었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준비하고 바로 학교를 갔었다.


그 이후 엄마는 내 공부를 의심하셨다. 학교에서 영어 점수를 87점을 받아왔더니 100점도 못 받으니 과외를 끊으라하셨다. 오기로 다음 시험 때 100점을 받아왔더니 혼자서도 잘하니 과외를 끊으라하셨다.


그 때 나는 친언니가 14살일 때만 해도 국어, 수학, 영어 이것저것 사교육을 다니면서도 영어 성적이 떨어지면 한 번에 영어 학원을 두 군데나 등록해주셨었단 걸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막내 남동생은 초등학생이어서 이것저것 해봐야 된다며 예체능 분야도 되는 대로 사교육을 보냈었다. 나는 영어, 수학 과외 둘 뿐이었다. 그마저도 자꾸 끊으라고 재촉하셨다.


오기로 다니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전부 내가 혼자 공부할테니 학원을 끊는 대신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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