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지구대 실습 일지 - 1화
8년 만에 다시 입어보는 근무복.
잘 다려진 근무복을 나는 바로 입지 못하고 몇 번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이론으로만 배웠던 사건들을 직접 만나러 가는 날이라 근무복을 바로 입지 않았다.
그동안 편하고 부드러운 소재의 옷에 길들여진 나의 몸이었지만 7시 아침에 입는 이 뻣뻣한 반팔 셔츠가 얼마나 입고 싶었던지 모른다.
8년 전 의경 때 입었던 아이보리색에서 짙푸른 색으로만 변했을 뿐 근무복은 그대로의 재질과 외형이었다. 22살에 온갖 불평불만을 가진 채 의경 생활을 하던 내가 가슴 벅찬 기분으로 30에 그 옷을 다시 입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된다 된다 하더니 드디어 지구대를 나가보네 가서 실수나 하지 말어.”
어머니가 가지런히 놓은 신발을 소중히 들고 자동차에 타자 아버지는 힐끗 나를 바라보시고는 한마디를 툭 던지신다.
경찰서로 출발하는 내내 아버지는 운전대를 꽉 쥐고 계신 채 상기된 표정을 띄고 계셨다. 어릴 적부터 수갑 흔들며 나쁜 놈 잡는 경찰이 될 거라 외치던 아들이 이제야 꿈을 이뤘다는 기쁨과 품 안에 있던 자식을 사회로 내놔야 하는 걱정이 교차되는 듯하다.
“나 이제 서른이야! 서른! 공자도 서른이면 학문의 기초 정도는 확립할 수 있다는 이립이라 하잖아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걱정은.”
“또 어디서 주워 들었다고 이립 같은 소리 허네. 그래 봐야 아직 애는 애지. 어여 내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첫인상에 마치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하는 듯 빨리 내리라고 손짓하면서도 아버지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하기사. 군대를 졸업하고 5년 동안 신림에서 공부만 해왔으니 아버지의 시계는 20대 중반 신림에서의 뚱뚱부은 아들에게 멈춰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마치 어제까지 근무한 사람처럼 손사래를 치며 경찰서로 들어섰다.
당당하게 입장하기는 하였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이라는 흥분감은 쉽게 감출 수 없었다. 취준생에서 사회 직업인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실습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직원분은 짧은 격려와 함께 친절하게 방문 카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미로처럼 섞인 경찰서를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목적지인 경무과에 도착하였다.
한창 바쁠 시간대에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나의 첫인상은 마치 어긋난 퍼즐 조각처럼 맞지 않는 곳에 있는 듯 보였다.
그래도 의경 때에는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과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다 보니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는 벅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안내를 받고 만난 건장한 체격의 경무과장님은 이것저것 입직 경로 등을 물으시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허리띠를 잠시 달라고 하셨다.
“어딜 가든 사람은 인사성과 단정함을 보게 되어있어요. 별거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작은 첫인상으로 많은 것을 판단합니다. 내가 해줄 건 이 정도겠네요.”
“..... 감사합니다”
기다란 허리띠를 나의 체형에 맞게 짧게 자르는 모습에 감사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별다른 조언이나 행동보다도 벨트를 정리하는 단순함은 더 이상 교육기관에서 책상에서 상상하던 모습이 아닌 이제 실전이라는 긴장감을 환기시켜주었다.
“후보생 데리러 왔습니다.”
짧은 고민에 빠지는 사이 덩치가 커다란 직원 두 명이 경무과로 들어와 나를 호출하였다. 짧아진 허리띠 덕분인지,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당당함 대신 떨림이 교차하는 얼굴로 순찰차에 올라탔다.
걱정이 서린 얼굴을 알아차렸는지 가는 동안 직원 두 분은 고향과 나이 등을 물으며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무어라 대답한 지 기억도 나지 않은 채 반쯤 흥분한 상태로 떠들다 보니 눈에 익은 도로가 펼쳐졌다. 코로나로 인해 고향으로 지구대 발령을 난 상황이라 어린 시절을 보낸 아산으로 발령날 것은 알았지만, 지구대 위치가 졸업한 중학교 바로 옆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곳은 15년 전 모습에서 몇 군데만 바뀌었을 뿐. 건물은 고사하고 도로조차 그 모습 그대로 덩그러니 펼쳐져진 나의 학창 시절 자체였다. 그 옛날 친구들과 어묵 국물을 더 얻어먹기 위해 주인아주머니에게 애썼던 분식집. 비집고 포개 앉아 눈바람맞으며 먹었던 라면집. 저 골목길에서는 늘 낄낄대며 너스레를 떨던 친구들이 뛰어다녔는데 모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있었서 신기했다.
무거운 가방 지고 다녔던 중학생이 30살이 되어 그 장소에 나타나니 순간 햇살이 눈이 부시며 눈물이 찔끔 났다. 그처럼 익숙한 곳에서 미지의 장소로 들어간다는 모순적인 상황에 긴장감은 더욱 깊어져 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아파트 단지가 숲처럼 둘러싼 삭막한 도로 위였다. 그곳에 희여 멀건 한 건물 하나가 덩그러이 나를 응시한 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내려주신 직원분들은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했지만, 안에 가득한 제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경찰로서 첫인상을 어떻게 보여야 할지 갑갑한 마음에 경무과장님이 수선한 벨트를 쉴 새 없이 매만지며 입구에서 서성였다. 맞지 않는 퍼즐처럼, 단정하지 못한 학생처럼 두 번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밖에서 서성이며 고민되던첫인상의 긴장감은 갑작스레 등장한 초등학생 덕분에 싱겁게 사라졌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초등학생이 마치 편의점을 들리는 듯 체온 측정 하기 위해 지구대로 곧장 들어서자, 밖에 서있던 나도 엉겁결에 밀려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분주하던 직원분들이 일제히 쳐다보기 도전에 학생은 앞으로 나온채 두팔을 뒤로 쭉 뻗으며 “오줌 싸러 왔...습니다!!” 발표하듯 당당히 소리쳤다.
각자의 업무로 바쁘던 직원분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초등학생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직원분만이 이해한다는 듯 “그래 그래요...”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뒤따라온 나를 발견하였다.
“그쪽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 순간 유머스럽게 첫인상을 남기고 싶어 “저도 오줌 싸러 왔 습니다!!”라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다행히 이곳은 실습지라는 이성 덕분에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리 속에 되뇌었던 첫인상을 위한 발표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돌한 초등학생 덕분에 긴장은 풀렸고, 마치 미리 각본이 정해져 있다는 듯 자기소개는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인사를 꾸벅하고 박수소리를 듣는 와중에 화장실을 나온 학생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는 유유히 지구대를 나갔다.
그제야 지구대나 파출소는 공공기관으로서 용변이 급한 시민들에게 공중화장실 개념으로 화장실을 개방해준다는 것이 기억났다. .
건물도 칙칙하고 입구와 주변도 경직되어 있으나 그 순간 초등학생에게는 가장 필요하며 편한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덕에 아침부터 경직되어 있던 첫인상에 대한 긴장감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지구대를 향한 나의 첫인상도 부드럽게 바뀔 수 있었다.
코미디 같은 지구대의 첫인상 덕분에 이후 한 달여간 지구대 생활을 뜻깊고 활기차게 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도 어려우면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것처럼, 내 꿈이 이루어진 이곳에서 시민들의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보리라는 마음을 다잡아준 뜻깊은 첫인상이 아니었나 싶다.
tip - 화장실이 보이지 않을 땐 지구대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