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첫눈이 펑펑 내려 자고 일어난 사이 새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었어. 나뭇가지 위에도 아스팔트 바닥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지. 한 발자국씩 걸으면 뽀득한 느낌, 창문을 열면 보이는 새하얀 풍경에 압도되는 기분이 참 오랜만이더라. 그 풍경을 볼 때면 아무도 지나치지 않은 무결하고도 순수한 세상이 떠올라.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제대로 눈사람을 만들어보는 게 나의 오랜 소원인데 올 겨울엔 이룰 수 있으려나?
첫눈 때문일까? 오늘은 참 기분 좋은 일이 많았어서 네게 들려주려고 편지를 써. 그래서 오늘 편지는 좀 일기 같을 수 있지만 이런 하루는 반드시 네게 들려주고 싶으니까. 아침부터 친구로부터 오래 기다리던 소식을 전달받았어. 벅찬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내 일처럼 행복하더라. 내게 힘든 일이 있으면 유독 내 편이 되어주고 신경 써주는 친구라 그런지 그 사람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마치 선물 같고 소중했어. 언젠간 내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 네게 가기 위한 과정에 그런 행복한 날도 있겠지. 그리고 그 과정엔 내 친구도 함께하겠지.
점심시간엔 한 달 만에 병원에 가서 결과를 들었어. 제발 좋은 결과를 듣게 해 주세요, 이번주 내내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다행히 결과는 좋았어. 이제는 약도 줄이고 이대로 지켜보면 될 것 같대. 운동도 다시 시작해도 되고 끊었던 술과 커피도 이제 내년이 되면 몇 잔쯤은 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건강을 잃고 나니 예전엔 당연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껴야 하는지 깨닫게 되더라. 기다리던 이 말이 얼마나 마음을 찡하게 하던지. 그토록 오랜 시간 불안해하고 힘든 상상을 하며 버텨야 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애틋했어.
오후에 회사에 돌아와서는 이직하고 처음으로 상사에게 칭찬을 들었어. 너도 알다시피 유독 이번주에 일이 몰려있었잖아. 지난주부터 마음 어지러운 일이 많았지만 매일 늦게까지 일하며 최선을 다했거든. 경력직으로 입사했으니 나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는 압박감 속에 지난 한 달 반을 살았고 그가 무엇을 시키든 제일 빠르고 정확하게 해내려고 노력했는데, 오늘 짧은 시간 안에 정말 잘했다는 말을 듣고 순간 마음이 덜컹하던 것 있지?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그런 말이었어. 앞으로 더 잘 해내고 싶어지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지는 뜻깊은 순간.
저녁엔 업계 사람을 만나서 대방어를 먹었어. 시린 겨울엔 기름이 잔뜩 오른 대방어를 먹는 게 또 낙이잖아. 이런저런 요즘 드는 생각과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제로 콜라로 짠도 하고 마음껏 웃었어. 오늘 하루동안 행복한 일들을 얘기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진짜로 웃은 것 같아. 인생은 때때로 이렇게 깜짝 선물같은 날이 있으니까 내일이 기대되는 거겠지. 힘든 날도 있겠지만 이런 하루를 위해 또 하루, 그다음 하루를 살아내는 거겠지.
처음 갑상선 항진증을 진단받았을 때도, 약 부작용 때문에 간수치가 정상의 6배를 넘어가 내려갈 기미가 없었을 때도, 마지막 약을 시도해 보고 이것도 맞지 않으면 절제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난 좌절했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추락했어.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남들은 다 무난하게 넘어가는 병일 텐데. 걱정하고 걱정하고 또 걱정했어. 최악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몸부림쳤지. 이직을 결정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날 인정해 주는 편안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또다시 나를 또 증명해 낼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건강도 좋지 않은데, 라며 스스로를 의심했어. 혹시나 다시 인정받지 못한다면? 너무 힘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날 삼켰고 막상 입사해서도 내가 인정받기까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했어.
하지만 오늘 하루를 통해 확신할 수 있어. 결국, 마침내, 모든 것은 다 잘될 거고 잘되기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웃음이 나지 않고 걱정에 휩싸이던 날들을 뒤로하고 어느 날 모든 게 괜찮아져 있을 거라는 것을. 다시 행복하고 함박웃음을 짓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해맑은 나로 돌아갈 거라는 명백한 사실을 말이야. 이제는 건강이 허락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독서 모임과 요가를 곧바로 등록했어. 앞으로 지낼 날들이 너무나 기대 돼. 얼마 남지 않은 올해엔 하지 않은 일들을 좀 해볼까 해. 유기견, 유기묘 봉사도 가고 소설 클래스도 다시 열어야겠어. 다시 바쁘게, 그러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행복하게 지내자, 우리. 정말 많이 사랑해.
11월의 끝자락,
널 가장 아끼는 네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