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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May 03. 2020

오웰과 아일린

오웰은 1935년 초여름 로절린드 오버마이어의 파티에서 결혼할 여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파티 주최자의 대학원 동료이며 버트의 지도 아래서 연구하던 사람이 참석했던 것이다. 그녀는 똑똑한 젊은 여성으로 오웰보다 두 살 어렸으며,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사진에 포착된 바로는 고양이 얼굴에 수심 어린 표정이었다. 오버마이어는 오웰이 파티 후 설거지를 하며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일린 오쇼네시는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야.” 그는 이전 여자 친구들에게 했던 것보다 좀 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구애했다.     


그들은 서로 잘 맞았고 빨리 연인이 된 것 같다. 가을에 그가 청혼을 하자 그녀는 받아들였다. 왜 수락했느냐고 한 친구가 묻자, 그녀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내가 서른이 되면 나한테 처음으로 청혼하는 남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거든. 그러니까…… 나는 내년에 서른이 돼.” 오웰이 농담했던 것처럼 울워스(모든 상품의 가격이 3펜스에서 6펜스였기 때문에 3d to 6d라고 불렸다)에서 산 결혼반지를 받게 되리라는 가능성에도 그녀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았다.     


오웰을 만났을 때 아일린은 그리니치에서 오빠와 그웬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일린은 문법 학교 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상위 2등급 우등”을 받았지만, 연구를 계속할 정도로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 졸업 후 아일린은 이런저런 일을 하며 정착하지 못하다가 1934년 UCL의 심리학과 석사 과정에 등록했다.     

오웰은 데니스 콜링스와의 관계에서처럼 남의 두뇌를 도용하는 데 고수였다. 아일린이 도움을 준 부분 또한 비슷하게 유추할 수 있다. 오웰은 콜링스의 인류학적 연구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아일린의 연구에 대해 주의 깊게 논의했을 것이다. … 중요한 점은 오웰 자신의 생각을 비옥하게 해준 분야에서 그녀가 그보다 지성적으로 단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일린은 결혼식에서 여성의 순종 맹세를 일부러 삭제했다. 그러나 그녀는 온전히 순종했다. 논문을 제출하기까지 불과 몇 달을 남겨 두고 그녀는 UCL에서 자취를 감췄다. 결혼식 준비로 연구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닭 모이를 주고 염소 젖을 짜느라 학교에 가는 것과 지도 교수와 면담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오웰이 먹을 삶은 계란도 삶아야 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역시 결혼에 동반된 힘겨운 집안일을 상쇄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던 듯하다. 아일린은 오웰이 결혼 전의 성 편력으로 지금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품었다. 그와 관계를 했던 다른 이들은 그의 행위를 성급하다고 묘사했었다. 그가 추구했던 문체처럼 언제나 간단명료했다.     


오웰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는 사실을 아일린의 편지는 밝히고 있다. 그는 “결혼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자신이 칠 일 동안 이틀 분량밖에 일을 못했다고 억울해하며 불평했다.” 그는 바로 그 이틀 동안 가장 뛰어난 산문 중 한 편을 썼다. 버마의 코끼리 사냥에 관한 글이었다. 아일린의 타자 학교 수학과 비서로 일한 경력은 그녀가 가져온 중요한 혼수였다. 단정한 원고는 그의 출판 기회에 도움이 되었고 글을 쓸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들을 자주 보았던 리디아 잭슨은 말했다. “그는 그녀를 당연한 존재로 여겼다. 어떤 남편이라도 그런 아내는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존 서덜랜드 <오웰의 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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