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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Dec 22. 2018

소설이라는 예술_2

그 어떤 일관성이나 판단도 없이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당장 종이가 필요한 순간들이죠. 그런 순간에는 뭔가가 발생합니다. 그런 순간은 아주 짧은 동안만 지속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순간이 지속된 만큼만 계속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시를 쓰기에는 충분하죠. 


소설을 쓰면서는 이런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써봐야 5~10페이지 정도겠죠. 그러고 나서 … 내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시작해야 할 겁니다. 


또한 소설을 쓰면서는 여러 문제들이 하나 둘씩 나타납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다니엘과 이자벨이 스페인 고속도로변 공터에서 여우를 만나는 순간을 나는 처음에 이렇게 썼습니다. 다니엘이 타고 다니던 벤틀리에서 내렸다고요. 몇 달 후에 네덜란드어 번역자가 내 소설에서 벤틀리는 50페이지 앞에서 이미 팔렸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정상적으로 소설을 썼다면 다니엘이 벤츠에서 내렸다고 써야 했습니다. 프랑스 출판사에서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은 항상, 계속해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시도 뭔가를 말하고자 하지만, 소설에서 요구되는 일관성, 구성, 논리 같은 것은 난처하게도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상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에서 요구되는 것을 따르면 가독성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정직한 직무 수행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책을 쓰면서(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 늘 끼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명석한 의식과의 타협이 곧 나의 일상사인 셈이죠.


-미셸 우엘벡 <공공의 적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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