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내가 버리고 싶은 것

by 수산

우선은 변명한다.

그동안 바빴다. <서양미술사>를 다 읽기는 했지만 파트별로 글쓰기를 할 여력은 없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쓰겠다.


그럼 이어서 감상문을 적는다.

어제는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4권 정도 샀다. 같이 살고 있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몫의 문화누리카드가 내게 주어져 매년 20만 원씩은 꼬박꼬박 책을 사는 것에 투자할 수 있는데, 2월 3일이 그 20만 원이 들어오는 날이어서 알차게 사용했다. 당연하지만 아직 전부 사용한 것은 아니다.

구매한 책은 이렇다.


새의 선물, 은희경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라이프 인테리어 교과서, 주부의벗사 편집부

아더마인즈, 피터고프리스미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펼쳐 들었던 것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었고 하도 재미있던 나머지 앉은자리에서 360페이지가 넘는 책을 독파해버렸다.


'한 20대 여성이 대한민국 최대 인기 남배우를 납치한다'는 파격적인 줄거리에서부터 흥미로울 것은 예측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책이었다. 책이 출판된 92년도에 이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난 이 책을 2017년도에만 읽었어도 단 한 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단순히 페미니즘적인 의미를 담은 책으로서도 훌륭하지만, 줄거리의 완성도가 높고 사건 전개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살만한 책이었다.


이 책을 다 읽은 지 고작 2시간가량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나에게 있어서는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 청할 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책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인생에서 존경하는 인물상이 없던 내게 꼭 한 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강민주'라고 대답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남자들이 '아이언맨'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싶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나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 이 책을 읽은 어떤 여성이 그러지 않겠냐만은 나 역시도 깊이 공감했던 파트가 있었다. 하도 딱 맞아떨어져서 비실비실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욕설과 일상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들은 미개인이다. 그들은 여태도 동물에서의 진화과정을 끝내지 못한, 아직 많은 부분 수성(獸性)이 남아있는 야만인이다.


이 부분을 읽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던 나는 볼펜으로 체크를 해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일기장을 펼쳐 이렇게 썼다. '책 88페이지에 욕설하는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아빠 생각이 났다. (우리 아빠라는 호칭은 친근해서 싫다. K 씨 정도로 부르고 싶다.) 난 어릴 때 별의별 폭언과 욕설을 듣고 자랐는데 그래서인지 절대 입이 험한 사람으로 살고 싶진 않다.' 그리고 책장을 단 한 장 넘기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남자, 남들이 나의 아버지라고 하던 그 남자도 술고래였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그 남자와 연관된 그 무엇도 내 것으로 하고 싶지 않다.


1992년도의 작가가 2022년도의 내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대사를 적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그건 30년이 지나도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는 남편이 우리 사회에 널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말 사이사이 잘난 척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던 재수 없는 '강민주'에게서 나의 모습들을 발견했다. 나와 강민주 사이에는 때로 혈연보다도 질기게 느껴지는 여성이라는 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온전히 강민주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책에 끝부분에 담긴 진형준 문학평론가의 해설처럼 '강민주는 그네들 속에 살아 있지만, 그네들이 곧 강민주는 아니라는 것을'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나는 강민주로부터 큰 위로를 건네받았다. 나와 같은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주인공 '강민주'가 결코 피해자로서 잠식되는 모습만을 그리지 않은 이 책을 사랑하게 됐다. 영웅 신화적인 존재인 강민주의 생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도 긴 기간 사랑할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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