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폭탄 좀 안 터지나
아포칼립스 여성애 소설이라길래 혹했다. 게다가 김초엽 작가의 <지구 끝의 온실>을 좋아한다면 <해가 지는 곳으로>도 좋아할 것이라는 추천글을 봐서 더 혹했다. 나는 <지구 끝의 온실>을 작가 싸인본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좋아하고, 이것도 당연히 좋아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그랬다. 최악은 아니었는데, 그냥 그랬다. 내가 너무 기대를 했나 보다. 나랑 안 맞았다. 책에 감성이 가득했는데 나랑 파장이 맞지 않았다. 담담한 심리묘사 위주로 물에 침수되는 것처럼 위기가 닥치는 와중에 난 제발 좀 여기서 꺼내 달라고 하고 싶었다. 200페이지가량의 짧은 소설이라 얼른 읽어버렸지만 더 길었으면 하차했을 수도 있다. (돈이 아까워서 읽었을 수도 있다.)
내용이 대체적으로 답답하게 흘러간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 영화나 마블 영화 좋아하는 나한테는 '그래서 어디 폭탄 좀 안 터지나?' 싶은 마음이 든 것도 맞다. 나라고 모든 매체에 폭탄이 등장하는 걸 환호하지만은 않지만……. 그 생각이 들 만큼 지루했다……. 도리랑 지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졌고 갑작스럽다 보니 나로서도 응원해줄 마음이 솟구치지 않았다. 그래서 도리랑 지나의 매력은 뭔데? 내가 너무 GL소설에서나 볼 법한 것을 기대했나.
인물들이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를 계속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건데, 도리가 지나에게 선물해줌으로써 지나를 지나로 만드는 매개가 립스틱인 거……. 구리다. 2017년 소설이면 이런 게 별로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것 같다. 입술을 강조할 거면 차라리 립밤이 낫지, 웬 립스틱일까. 세상이 다 망했는데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게 립스틱이라고? 너무 별로인데? 나라면 낭만적이게 공책과 볼펜을 택하거나 실용적이게 도끼를 택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자꾸 강간당하는 걸 보자면 자연스레 기분이 불쾌해진다. 강간을 포르노적으로 묘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내용이면 화난다. 굳이 있어야 하나 싶다. 그게 없으면 위기를 만들 수 없나? 작가가 아포칼립스 배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위기가 무궁무진할 질병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강간이 가장 큰 위협인 소설이다. 건지는 성적으로 전혀 위협받지 않는데 도리랑 지나가 고생하는 거 보고 있자면 더 짜증 난다. 책이 묘사하는 사랑은 지나치게 멀리 있는 것 같고 책이 표현하는 고통은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것 같으니 애정이 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쉬운 부분만 얘기했는데, 아예 와닿는 문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난 이 부분이 좋았다.
그랬다. 나는 모든 것이 가장 지독해진 상황을 가정해야만 했다. 가장 지독한 것, 그건 바로 미소 없는 세상. 하지만 그런 세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 큰 불행은 내게서 늘 한걸음 정도 떨어져 있고 나는 정신병자처럼 그것을 내내 주시하고 있을 뿐. 그러다 홀로 골똘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는가. 불행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듯, 마치 그것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것은 너무 가까이 있다.
도리는 이래 놓고 이내 불행보다는 지나를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을 때의 나는 내 현실을 돌아보다가 문득 우울해져 있던 찰나였는데, 이 문구를 읽고는 생각해봤자 우울할 뿐이니 그만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장난 같으니 정정하자면, 깜깜한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에 충실하자고 마음먹었다는 소리다. 현실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미치기 십상이니 적절히 도피하는 편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