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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18. 2023

나는 엄마가 부럽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항상 조심스럽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도 그렇다. 내가 올린 글을 보고 누군가 우리 아빠에 대해 욕한다면, 그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한 짓이 워낙에 많았어야지. 그건 아빠 업보겠거니 싶다. 하지만 내가 올린 글을 보고 누군가 우리 엄마에 대해 욕한다면, 그건 싫을 것 같다. 나는 아빠가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엄마가 나를 힘들게 했던 일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애쓴다. 아빠한테는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받는 것 같은데, 엄마한테는 서로 주고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내 시점에서 쓰였으므로 엄마가 더 잘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내가 엄마한테 더 못해준 게 많을 거다.


아무튼 나는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때로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한다고 느낀다. 누가 더 사랑하니 마니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적어도 나는 내가 엄마한테 품은 감정이 지나치게 크고 무겁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일반적인 딸이 일반적인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더하다는 소리다.


원인을 따지자면, 나는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데리고 살아준 것이 정말 고맙다. 남들은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부모한테 버림받은 적이 없어서 그렇겠지. 부모가 자식을 책임지는 일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100명 중에 100명에게 모두 일어나는 일이 절대 아니다.


내가 12살 때였나, 엄마는 아빠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날 먹여 살리겠다고 늦은 나이에 재취업했다. 엄마는 나를 임신하면서 경력 단절이 됐었는데, 아빠가 돈을 못 벌어오자 전공과 무관한 단순 노동에 발을 들인 것이다. 엄마가 하는 일은 최저시급도 못 받는 데다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또 주 6일을 필수로 일해야 해서 나를 거의 신경 써주지 못했다. 나는커녕 당신 몸 하나 챙기기 힘들어하셨다. 엄마는 무릎에 물이 차서 몇 주는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던 때도 있었고, 양손에는 전부 물집이 잡혔고, 이전보다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아무튼 나는 열두 살부터 혼자 있어 버릇을 하게 됐다. 내 밥은 내가 알아서 차려먹어야 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하지는 못했고, 보통 컵라면을 사 먹거나 엄마가 아침에 하고 간 찌개를 데워먹는 식이었다.) 아빠는 집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일하러 나갈 때는 거의 없었고(당시에 아빠는 보험을 팔러 지방에 가곤 했다) 대체로 경마장에 가 있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서 경마 영상을 보곤 했다. 가끔 내가 아빠와 단둘이 집에 있을 때 배고프다는 티를 내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라면이나 소면을 끓여줄 때가 있었고(내키지 않으면 그냥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너네 엄마는 대체 왜 뭘 안 차리고 나간 거냐며 구시렁대며 생색을 잔뜩 내곤 했다. 나는 매일매일 집에 아빠가 제발 없었으면 하고 빌었다.


엄마의 직장과 당시에 내가 다니던 학원은 모두 외조부모님 댁 근처에 있었고, 나는 가끔 아빠가 너무 무서울 때 그곳에 도망을 갔다. 그때까진 외조부모님이 나한테 나름 친절하기도 했다. 종종 '얼마 전에 tv를 봤는데 10살짜리 애가 혼자 밥을 해 먹더라' 하는 식으로 나한테 눈치를 주긴 했지만……. 말했듯이 나는 엄마가 아침에 하고 간 음식을 데워먹을 때가 있었는데, 가뜩이나 일하느라 힘든 엄마가 그것까지 하는 게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억울하네……. 난 그때 기껏해야 초, 중학생이었고, 아빠가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도 않았고, 일주일 중에 5일은 컵라면만 먹었던 것 같은데, 나한테 혼자 있을 때 요리까지 해서 먹으라는 게……. 그래……. 당신들 딸이 무지 소중하셨던 거다. 어린 손녀딸보다는.


중학교 2학년 이후로는 이전보다 외조부모님 댁에 가기 어려워졌었다. 지금 글 주제랑 별로 상관은 없지만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라 적는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갤럭시 S2를 쓰다가 학교에서 잃어버린 일이 있다. 추정컨대 어떤 놈들이 훔쳐갔다(당시 학교에 핸드폰 도둑이 많았다). 아무튼 나는 이걸 아빠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아빠가 알면 또 얼마나 화를 낼지 두려웠다. 나는 패닉 한 상태로 핸드폰을 찾다가 결국 외조부모님 댁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당시에 다니던 대형종합학원에(한 달에 학원비만 40만 원은 들었나? 아빠가 매달 그거 가지고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나 그때 전교 5등은 했었는데.) 갈 시간이 됐길래 등원해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 중에 직원 분이 들어오시더니 우리 아빠가 찾아왔다고, 나보고 짐 싸서 데스크가 있는 1층으로 내려가라는 거다. 내려가니까 아빠가 데스크 직원들한테 내 남은 학원비를 환불해 달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한 달씩 등록하는 거고 이미 15일이 지나서 환불이 안 되는데 남은 거 환불해 달라고. 직원 분들은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지 그걸 정말로 환불해 줬다. 그리고 난 그렇게 그 학원에 다시는 못 다녔다. 아빠는 내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학원에 갈 자격이 없다고 했다. 나 같은 (검열)한테는 학원비를 내줄 필요가 없다는 거다. 사실은 내 학원비를 예전부터 아깝다고 생각했던 거면서, 환불이 안 된다는 직원들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돈을 받아냈으면서, 내가 거기 2년 다니면서 사귄 친구들과 선생님 모두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못하도록 망신을 줬으면서……. 대체 그때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곱씹으니까 또 억울하네…….


어쨌든! 그 뒤로는 외조부모님 댁에 갈 일 별로 없었다. 엄마가 영양실조로 일을 몇 달 쉬면서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기 전까진 말이다……. 그때 엄마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럴 만했다. 아빠가 외조부모님 댁에서까지 돈을 빌리지 외삼촌 돈도 날렸지 그런데 계속 경마장가지 매일 물건 부수고 소리 지르고 같이 죽자고 하고 등등.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 중에 제정신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때 엄마는 가끔 나보고 존댓말로 말했고, 기분이 오락가락했고, 말없이 집도 나갔고, 내가 잘못되면 죽는다거나 하는 소리를 자주 했다. (제발 둘 다 열다섯 살 앞에서 죽자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소리 좀 그만해~) 그때 이후로 나는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한테 의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가 진짜 죽을까 봐. 나는 엄마가 자살한다거나 가출한다거나 하는 불안에 계속해서 시달렸다.


아무리 나라도 평범한 학생답게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거나, 친구랑 싸우거나, 성적이 내 마음처럼 나오지 않거나……. 학교 가기 싫은 순간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런 문제를 엄마한테 상담한 적이 없다. 중학교 3학년 때였나, 미술을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울면서 미안하다고(우리 엄마는 왜 이렇게 나한테 울면서 미안하다고 한 순간이 많을까……)한 뒤로는 뭘 하고 싶다고도 말한 적 없다(생각해 보니까 이건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냥 엄마랑 아~무 대화도 할 수가 없게 됐다. 엄마는 내가 챙겨줘야 하고, 내가 언제나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존재이지,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거나 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는 이전에도 그렇게까지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그냥 객관적으로……. 내 성적이 떨어지면 밥을 안 준다거나 공부를 안 하면 진심으로 화를 내면서 매를 든다거나……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그 정도 어머니상은 흔하지 않나? 우울증 진단받은 뒤로는 평범한 어머니상에서도 벗어난 것 같다. 어쩌면 엄마는 그대로인데 내가 엄마를 예전처럼 못 대하는 걸 수도 있겠다.


아빠가 나를 버리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엄마, 나, 이렇게 넷이 살게 됐을 때부터는 관계가 점점 더 달라진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나는 엄마랑 정말 많이 싸웠다. 아니, 한 이십 대 초반까지도 많이 싸웠다. 엄마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대학에 갈 준비를 하면서부터 조금씩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때 일은 말해봐야 좋을 게 없으니 넘어가자.


요즘은 내가 엄마의 남편이자, 남자친구이자, 베스트프렌드이자, 딸이자, 엄마 같다. 이상한 말일 수도 있는데 정말 그렇다. 나는 엄마가 가방이 무겁다고 하면 들어주고, 엄마가 나한테 애교 부리는 것도 받아주고, 엄마가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들어준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엄마한테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하고 물어볼 수는 없고, 엄마한테 내 진로나 인간관계에 대해 상담할 수도 없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엄마한테 전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는 여전히 이 집안에서 제일 사랑받는다. 외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 외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엄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엄마.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아빠와 같이 산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와 아빠는 엄마를 버리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긴 하지만 엄마한테 같이 죽자고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경마를 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화내는 모습도 본 적 없다(뉴스 보실 때 말고). 엄마는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하면 걱정해줄 사람들이 있다. 엄마를 책임져줄 사람들이 있다.


엄마가 부럽다. 내가 너무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나. 엄마는 나만 아니었어도 더 몸 편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을 거고, 지금 내가 쓰는 방도 엄마 방이 됐을 거고, 아빠랑도 과감하게 헤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엄마 인생을 다 망쳐놓고선 엄마가 부럽다는 얘기를 하면 기만적인 건가.  


여전히 엄마가 날 키워줘서 고맙다. 그리고 앞으로도 엄마를 제일 사랑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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