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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17. 2023

기초생활수급자가 뉴욕 여행에 가면

뉴욕에서도 기초생활수급자의 삶을 살아야 돼(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늘 해외여행이 가보고 싶었다.

때는 고등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뭐냐고 물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진 <원피스> 전집을 떠올렸다. 그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한테 뭘 갖고 싶다고 입 밖으로 내뱉은 물건이었다. 그전까지는 뭘 갖고 싶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난 유치원 때부터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어서 그냥 모~든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데 <원피스> 만큼은 정말 못 참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엄마도 나한테 사주고 싶었나 보다. 한 40~50만 원 정도는 했던 거 같은데 그걸 내 돈 조금 보태서 생일 선물로 받았다. 그때 정말 온갖 감정이 몰아쳐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내가 우니까 엄마도 미안하다고 울었다……. 나중에 집이 이사 가느라 좁아져서 그걸 버릴 뻔했을 때는 또 엉엉 울면서 쓰레기장에서 찾아왔던(차라리 책을 버리지 이걸 어떻게 버려)…… 아주 구질구질한 추억의 만화책 전집이다.


근데 그때 내 친구는 자기의 제일 소중한 보물이 ‘가족들과 세계여행을 다녔던 경험’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정말이지 그런 식의 박탈감은 또 신선했다. 뭐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좀 황당했던 것 같다.

세상에는 이런 인생도 있구나…

그런데 이 사람이 내 친구구나……

우린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데 이렇게나 다르구나…

그리고 ‘대체 해외여행이 얼마나 좋길래’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비뚤어진 마음으로 삐딱하게 해외여행을 바라본 것 같다. 내가 겪었던 국내 가족여행 몇 번은 하나같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가족 여행을 가면 항상 아빠한테 혼났던 기억뿐이다. 혹은 아빠가 다른 사람들이랑 싸워서 무서웠거나. 내가 새벽에 등산을 가기 싫어해서 혼나고, 내가 텐트에 있는 벌레를 무서워해서 혼나고, 내가 먹고 싶다고 한 음식점에 줄이 길어서 혼나고……. 그럼 또 온갖 폭언을 듣다가 아빠가 혼자 차를 타고 먼저 가버리면 나는 한여름에 엄마 손을 잡고 풀밭밖에 안 보이는 국도 한복판을 울면서 걸어갔던 지옥 같은 경험이 몇 번……. (몇 시간 지나면 혼자 분이 풀린 아빠가 U턴해서 돌아왔고 나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구나……. 내가 여행 가는 걸 싫어했던 이유가 있다.

그래도 모든 상처는 시간이 치유해 주는지, 친구들이랑 갔던 여행은 전부 재밌었고 엄마랑 둘이서만 갔던 여행도 다 좋았다. 혼자서 국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것도 좋았고. (여행 갈 돈 어디서 갔냐고 물으면 나는 지금껏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나름대로 용써서 불려놓았으며 평소 생활 수준이 매우 낮다고 얘기하고 싶다… 또 문화비는 전부 문화누리카드로 지불하는데 가족들이 다 가난해서 매년 55만 원을 내가 혼자 쓸 수 있다… 요새 가난한 사람이 돈가스 먹고 롱패딩만 입어도 뭐라고 하는 세상이라 괜히 줄줄 해명한다… 너넨 가난에 대한 이해가 없냐? 나는 국가 지원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고… 불만 있으면 우리 집에서 일주일만 살아봐라.)

갑자기 버튼 눌려서 좀 길게 말했는데 아무튼 해외여행도 자연스럽게 가고 싶었다.


간다면 무조건 뉴욕이나 파리였다. 미술관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전미술은 파리가 중심, 현대미술은 뉴욕이 중심.) 솔직히 처음에는 거~의 파리로 쏠려있었는데 내가 찾은 뉴욕행 비행기가 조금 더 저렴하기도 했고… 프랑스어보다는 영어가 낫겠다 싶어서 뉴욕으로 정했다. 평소에 미국 드라마, 영화에 심취해 있는지라 뉴욕에 대한 환상이 큰 것도 있었다. 그리고 환율이 최저치를 찍던 2년 전…… 내가 당시 전재산의 반의 반 정도를 과감하게 환전하여 미국 주식에 투자했고 그게 그대로 늘어난 채로 계좌에 잠들어 있었던 덕분도 있다. 과거의 나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첫 해외여행 겸 첫 혼자여행을 뉴욕으로 다녀왔으며, 다녀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다사다난했지만……. 너무 많은 자극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분이었지만! 거기에서까지도 돈 아끼느라 바나나 사 먹으면서 구질구질하게 다녔지만! 그래도 충분히 가치 있었다. 이상하게 가난한 것도 뉴욕에서 가난하니까 또 낭만 있더라고(이게 뉴욕 사람들에게 얼마나 천인공노할 소리인지는 알고 있다). 일주일 동안 다녀왔는데 다음에는 더 길게 가고 싶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모아서 가고 싶다……. 뉴욕 또 가고 싶어. 용기가 생겨서 다음에는 다른 나라들도 얼마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는 그때 그 친구가 왜 인생 최대의 보물로 세계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꼽았는지 이해한다. 나는 여전히 원피스 전집을 버리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버리지 못하겠지만, 걔의 인생을 문틈으로 잠깐 경험해 본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지금은 왠지 걔가 세계 여행 다녀온 것보다 내가 뉴욕 여행을 더 재밌게 다녀왔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까지 든다. 남들보다 조금 늦긴 했어도 나도 나만의 보물을 얻었다. 그게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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