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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19. 2023

내 친구들은 왜 나랑 놀까

고맙게

비록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고등학생 시절 날 유독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은 걔가 나한테 '너처럼 인생 살고 싶어' 이런 말을 해줬다. 넌 친구도 많고~ 재밌고~ 예의 바르고~ 뭐 이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나라고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친구가 많고 재밌었던 건 아닌데 당시에 좀 잘 나갔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폼 미쳤었다는 말밖엔.)


그때 내가 정신병이 심화되어 있던 터라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참 슬프게 들렸다. 걔는 내가 아빠랑 같이 안 사는 것도 모르고, 아빠한테 내가 버려진 줄도 모르고, 내가 반지하에서 사는 것도 모르고, 내가 매일 엄마가 자살하지 않을까 불안한 것도 모르고, 내가 언제나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왜 사람들은 항상 내가 힘든 걸 이렇게 몰라주는 걸까? 왜 나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거지? 내가 그렇게 멀쩡해 보이나? 난 한 번도 그렇게 멀쩡한 적 없었는데 이상하다…….


돌이켜보면 황당한 생각이다. 내가 티를 안 내는데 초능력자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그리고 다들 각자만의 힘듦을 가지고 살아갈 텐데 나한테 신경 쓸 겨를이 어딨겠어. 오히려 내 장점에 주목해 줘서 고맙지. 살면서 그런 말을 언제 또 들어보겠냐. 걔를 다시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더는 나처럼 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때 그 말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 말 덕분에 '내 인생도 누군가가 보면 부러워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으니까 말이다.


난 여전히 누군가에게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다. 아니, 물론 나만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모두가 자신의 힘듦을 아무에게나 마구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난 그냥 누구한테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의 힘듦을 털어놓아야 관계에 좋은 건지를 모르겠다……. 상대가 힘들었던 얘기를 나한테 이야기해 주면 나도 제대로 공감해 주며 내 얘기를 털어놓고 싶은데, 상대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무거울 때가 많아서 어떤 식으로 돌려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가까운 상대한테도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어진다.


한 달쯤 전인가? 친구들이랑 같이 국내여행을 갔던 적 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서 서로 각자 힘들었던 얘기나, 집안 사정이나, 현재 걱정거리나……. 그런 걸 얘기하는 시간이 됐다. 근데 내가 듣기엔 걔네의 걱정거리가 너무 평범한 거다. 하…….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물론 그 친구들도 각자 힘들고 생각이 많고 괴롭겠지만, 나는 차마 그 앞에서 막장드라마 줄거리 같은 내 걱정거리를 하나도 얘기할 수가 없겠는 거다. 취직 걱정, 유산 걱정, 이런 거 하는 애들 앞에서 '아빠가 엄마랑 이혼을 안 해준대' 같은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분위기상 그럴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냥 들어주고 있는 게 낫지.


심지어 얘네는 유일하게 내가 지금 아빠랑 따로 산다는 것을 아는 애들인데도 그렇다. 내가 아빠랑 따로 살게 된다는 것을 알자마자 카톡방에다가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땐 16살이었고, 친구들과 모여 살았던 동네에 더는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충격이라 애들한테 '이사 간다'라고 말하면서 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 빚 때문에 쫓겨서 이사 가는 건 말 안 했지만.) 물론 우리 아빠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나랑 무슨 관계인지, 지금 연락을 하는지 안 하는지 같은 건 얘기 한 적 없다. 대충은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적당히는 얘기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얘기하는 게 '옳다'라고 느껴질 때까지도 있다, 하도 나만 들어가지고),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알게 되면 애들이 날 귀찮다고 생각할 것 같고…….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들한테 말하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사람 아냐? 그래서 그냥 브런치에 쓰게 된다. 여긴 날 아는 사람들도 없고 소통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돈이 좀 있었으면 그냥 상담을 하러 다녔을 텐데. 객관적으로 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증세는 이제 사라졌는데, 여전히 트라우마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명절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얼마 전 추석에 브런치에 쓴 글 보면 진~짜 힘들어 보인다. 난 내가 그 정도일 줄 몰랐는데 다시 읽으니까 심했구나 싶다.), 가끔 밖에서 트라우마가 연상되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도 받는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엄마랑 하늘공원에 놀러 가서 맹꽁이버스를 탔는데 내 바로 옆자리에 어린 여자애랑 그 아빠가 앉아서 계속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듣고 있는 게 좀 힘들었다……. 뭐 그렇게 죽을 듯이 힘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순간 슬퍼져서 당황했던 정도다.


고민이다. 나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날 알려주면 누군가 나를 떠날 것 같다는 게……. 이건 아마 흔한 고민일 것 같은데 다들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거지?! 나도 그런 눈치를 좀 기르고 싶다고. 너~무 멀쩡하게 보이고 너~무 자기 얘기를 안 털어놔도 상대방은 내가 자기한테 관심 없는 줄 알더라. 아니라고 관심 너무 많다고. 관심이 많아서 얘기를 못하겠다고. 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밑천이 다 털려서 못하는 거라고. (난 초면에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부터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거짓말을 더 안 늘리려면 말을 아예 안 하는 수밖에 없다.) 난 타인에게 잘 보이려면 날 좀 숨겨야 하는 사람이다. 인스타 피드에 좋은 모습만 올리듯이 말이다. 나도 그걸 안다. 적당히 날 포장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누군가 내게 호감을 갖지만, 내 약한 모습을 아예 털어놓지 않으면 나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한다. 아~ 인간관계 어렵다.


난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까지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학교에서 심리상담을 받을 때나 진로상담을 받을 때나, 아니면 애들한테 편지를 받을 때나,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뭘 하든 굶어 죽지는 않을 것', '똑 부러졌다'라는 평을 받는다. 그게 참 감사하다, 감사한데.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랑은 차이가 있어서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너무 배부른 고민인가.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철인으로 보이고 싶은 건 아니라고. 나도 적당한 고난만 헤쳐나가고 싶다고. 아니면 그냥 모두가 나한테 립서비스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내가 하도 애쓰는 게 안쓰러워서?! 솔직히 그 정도로 알아서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잘하겠지 싶어서 상냥하게 거짓말해주는 건가?!


난 누가 내 인생을 좀 더 확실하게 분석해 준 결과가 듣고 싶다. 확률적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될 것 같은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는지. 누구랑 심도 깊은 상담을 해보고 싶다. 첫 출근한 김에 진짜로 상담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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