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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Sep 29. 2024

아버지 죽이기 (1)

오이디푸스 

[소선아. 집 가는 길에 엄마 소주 한 병만 사다 놔 줘.]

“술 먹지 말라니까.”

[한 병만 마시고 잘게. 엄마 잠이 안 와서 그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엄마는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잔씩, 5년이 지난 지금은 하루에 한 병씩. 처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떼를 쓰고 소리도 질러 봤지만, 엄마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게 엄마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는 걸 알고 난 이후로는 탓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내일도 술을 마실 거라고 짐작했기에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를 두 병 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기에 법적으로 주류를 구매할 수 없었지만, 편의점 주인 아줌마와 엄마가 안면을 튼 사이여서 사정을 봐주곤 했다. 아줌마와 엄마가 친한 건 아니었다. 번번이 소주를 사는 걸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엄마를 아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엄마가 소주 한 병 달래요.” 하고 전해주면 “그래, 알았다.” 하면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쯧쯔, 술을 끊어야 할 텐데……” 하고 맘에 없는 걱정을 하는 식이었다. 나는 울컥해서 그럼 아줌마가 안 팔면 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 소주가 담긴 봉투를 홱 하고 채갔다.


사탕 껍질 같은 까만 봉투를 달랑 들고는 좁다란 골목길을 헤쳐나간다. 이 동네의 집은 집이 아니라 엎어놓은 밥그릇 같다. 굳이 살아 있는 것의 집에 비유하자면 다닥다닥 징그럽게 붙은 따개비 소굴 같다. 걷는 도중에 마주한 치즈색 고양이를 따라 가장자리로 걸었다. 골목 사이사이엔 주인 없는 고양이와 그의 자식들이 한 무리는 살았다. 고양이가 파먹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밤에는 새끼 고양이가 인간의 아기 울음과 똑같은 소리를 냈다. 그것 말고도 시도 때도 없이 동네를 채우는 소리는 많았다. 이웃집 여자가 자식들을 다그치는 소리, 뒷집 부부가 싸움하며 세간이 다 부서지는 소리, 옆집 아저씨가 “씨발 씨발” 거리는 소리. 나는 그 모든 소리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았다. 바로 좁은 집이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말은 두둑한 곳간을 등에 업고나 통하는 말이다. 인간은 집으로부터 안전의 욕구를 채운다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집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이가 많다. 세면대 있는 화장실이나 샷시 잘된 창이나 비 새지 않는 천장 같은 세세한 조건을 통과해야만 정말로 ‘즐거운 우리 집’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좁은 집은 사람 숨통을 조인다. 그게 만약 반지하라면 더하다. 지상으로부터 계단을 여덟 칸 내려갈 때는 딱 그만큼 내 인생이 땅에 처박히는 기분이다. 현관문 앞에 놓인 이단 신발장에 낡아빠진 나이키 신발을 넣으면 꼭 저 신발과 같은 신세를 실감한다. 작달막한 신발장에는 엄마와 내 신발을 모두 합쳐 일곱 켤레가 겨우 들어간다. 엄마와 나는 다행히 옷 사이즈와 신발 사이즈가 같다. 나는 엄마보다 바지 기장이 길고 엄마는 나보다 허리둘레가 적지만 그 중간 사이즈의 옷을 억지로 입고 사이즈가 맞다며 우길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단점이 있다면 온전한 나의 것의 부재다. 신발과 옷은 엄연히 엄마의 수입으로 구매한 엄마의 것이므로, 나는 늘 내 것이 아닌 엄마 것을 빌려 입는 기분이다. 이 집에 내 옷은 하나도 없다.


요즘 세상에 도어락 없는 집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우리 집은 열쇠를 썼다. 때로 열쇠를 깜빡 두고 올 때면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근처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나는 아기 때부터 놀이터를 싫어해서 거기서 허송세월하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놀이터에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가는 내가 초라해서 싫었다. 옷에 한참 전에 생긴 얼룩을 뒤늦게 발견할 때면 모든 놀이를 관두고 집으로 도망쳐 울음을 터뜨렸다. 진작에 깨끗하게 세탁해주지 않은 엄마를 탓하면서 말이다. 엄마는 “괜찮아, 소선아. 엄마가 금방 빨아줄게.” 하고 나를 달래주면서도, 한편으로 제때 세탁을 해줄 만큼 나를 챙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했다. 그런 감정이 극에 달할 때면 눈물을 흘리며 내게 사과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나의 결핍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나를 챙길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얼핏 나의 결핍인 척하는 엄마의 결핍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불평이 엄마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걸 안 뒤로는 점차 놀이터에 가는 발걸음을 끊었다.


그보다 조금 더 자라서는 수치심이 닳아 없어졌다. “엄마는 바빠서 못 오세요.”, “기초생활수급자 맞아요. 그럼 석식도 같이 나오나요?”, “네, 올해 수학여행은 안 가요.” 나는 더 뻔뻔스러워졌고 조금 억척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따라서 지금의 내가 새삼스레 내가 놀이터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까마득한 어릴 적의 트라우마 때문보다는 내 오래된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고작 12% 남았기 때문이었다. 4년 전에 샀던 보급형 스마트폰은 배터리가 닳는 게 아니라 녹다시피 했다. 놀이터의 와이파이가 시원치 않다는 건 덤이었다.


그렇지만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열쇠를 까먹는 날이 있었고, 그럴 때면 주머니를 확인하기도 전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불길한 예감에 먼저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결이 조금 달랐다. 주머니에서 잡히는 금속 열쇠의 서늘한 기운에 온몸에 소름이 쭉 돋은 것이다. 열쇠는 제자리에 있었는데 까닭 모를 불안은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열쇠를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나서는 그 기운이 더했다. 나는 발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끝내 목덜미를 휘감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이전에도 경험해본 예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 집 앞에 주차한 아버지의 흰색 쏘나타를 보았을 때가 그랬다. 하교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아버지의 쏘나타가 그곳에 없기를 몇 번이고 기도하고선 골목을 돌았지만, 그 바람이 간절할수록 매번 좌절되었다. 흰색 쏘나타는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문다는 의미였다. 나는 아버지의 쏘나타를 보면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어슬렁거렸다. 아버지가 두려워 집에 들어갈 수도, 바깥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일찍 들어가면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늦게 들어가면 아버지가 나의 방황을 의심하고 분노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결국 나는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십 분 이십 분을 소리 없이 울다가 아버지를 빨리 마주하는 쪽을 택해버리곤 했다.


내가 열쇠를 우로 돌린 것은 바로 그때의 파괴적인 충동이었다. 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피할 수 없는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귀신의 증거와 마주했을 때 곧장 도망가지 않고 구태여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 찬장을 살피고, 끝내 문을 여는 것은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우리는 반지하에 살 것이고, 아버지는 나를 버릴 것이고, 엄마는 술을 마실 것이다. 불행을 마주하는 것은 익숙하다. 열쇠가 철컥,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나 생쥐가 내기에는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소리다.


누군가 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이다. 열쇠를 가진 건 나랑 엄마뿐인데, 엄마가 퇴근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엄마의 직장은 10년의 근속기간 동안 퇴근 시간보다 늦게 끝내주는 일은 밥 먹듯이 있었어도 그 반대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3의 인물이라는 것이 옳은 추측이다. 침입자라면 창문으로 들어온 건가? 아니면 열쇠를 복사한 건가? 허술한 보안 탓에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목적은 짐작할 수 없었다. 굳이 이 동네에서조차 가장 후미진 골방을 노려서 도둑질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구역질 나는 가정이기는 하나 나나 엄마를 해할 목적이었다면 우리가 귀가하지도 않은 시간에 왜 이곳에 들어왔단 말인가. 헐거운 문은 내가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열렸다. 나는 그게 동영상을 느리게 배속한 것처럼 굼뜨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우리의 작은 집은 원룸이어서 방에 사각지대가 없었다. 방의 어느 곳에 서 있든 방의 모든 모습이 다 보였다. 현관에서는 검은색 침입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아침에 등교할 때와 꼭 같은 풍경에서 열린 옷장과 덩치 큰 남자만이 위화감을 주었다. 현관에서 반쯤 뒤돌아 쭈그려 앉은 남자는 까만 숏패딩을 입었다. 남자의 몸에서는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으레 관리하지 않은 반지하에서 자주 나는 냄새다. 반지하서는 젖은 빨래를 재빨리 밖에다가 내놓지 않으면 금방 습기가 차 곰팡이가 낀다. 그래서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냄새가 났다. 그가 나와 동족이라고 생각했다. 구부러진 등은 여전히 내가 들어온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남자의 손이 현금 뭉치를 세고 있었다. 나는 현금 뭉치의 출처를 바로 알아봤다. 그건 엄마가 옷장 아래 깊은 곳에 감추어둔 비상금이었다. 나는 여태껏 그 존재를 모른 척하고 있었으나 엄마께서 내가 문제집이나 학용품이 필요하다고 하는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구겨진 봉투에 든 돈을 세고, 또 세고, 몇 번의 한숨을 쉬고, 거기서 또 몇만 원을 꺼내어 아침이면 흔쾌히 내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가족의 돈이었다. 엄마가 주마다 6일씩 52시간, 때로 55시간을 일하면서 번 돈 말이다. 엄마는 월급을 마음껏 쓰지도 않고 매달 내 청약통장에 10만 원씩, 내 용돈으로 5만 원씩, 또 내게 언젠가 줄 적금에 10만 원씩, 또 남은 돈은 봉투에 넣고 있었다. 그건 누구에게도 한 푼도 내줄 수 없는 돈이었다.


나는 도망하겠다거나 신고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순수한 분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나는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안다. 나에게 분노는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작은 트집을 잡아서라도 화를 냈다. 어느 날은 칭찬의 대상이, 어느 날은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분노를 견디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아버지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일찍 자는 척을 하고,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기를 포기했는데, 그건 단지 아버지가 분노하는 사람이고 내가 분노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고 나는 폭력을 당한다. 아버지가 상처를 주면 나는 상처를 입는다. 그게 집안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상처입혀야 한다. 아버지처럼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영원한 피해자로 남는 것이다. 나는 손에 들린 물건을 다 던져버리며 죽여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쳐야 한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가장 무서운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곳에서 나와 나의 엄마의 전재산을 뺏길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는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았다. 아버지! 아버지처럼!


“죽어! 이 개새끼!“


나는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를 집어 던졌다. 소주 두 병이 차례로 남자의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소주병은 꼭 옛날 예능에나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상케 했다. 병이 머리를 부딪치면서는 둔탁한 탁음이 났지만, 바닥에 떨어지면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집에는 침대가 놓일 공간이 없어 사시사철 이불이 바닥 한 켠에 접혀 있었다. 엄마와 나는 늘 거기 딱 붙어서 잤다. 소주병도 이불에 포근히 감싸져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았다. 마침 옆집 아저씨가 소리 질렀다. “씨발!” 나는 그때 아무도 이 소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죽어! 이 개새끼!”는 그저 이 동네의 일부일 뿐이다.


쪼그려 앉아있던 그는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미동도 없었다. 언제 멈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대로 저 괴한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여기서 죽는 건가? 더는 괴한의 움직임을 제한할 만한 무기가 없었다. 이불이나 커튼을 찢어 괴한의 팔다리를 묶는 상상을 했지만 우습게도 그걸 쓰기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괴한이 꼼짝 않고 누워있자 생각은 다른 쪽으로 뿌리를 뻗는다.

이 새끼 죽었나?


그럼 내가 죽인 건가? 나는 112나 119의 존재를 떠올렸다. 난동부리는 아버지한테는 통하지 않았던 그들이 괴한의 머리를 깬 나는 잡아갈 것만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거였나. 내가 문을 열고 소주병을 던지고 그가 찍소리도 내지 않고 쓰러지기까지 채 30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엎어진 그에게 다가갔다. 바지는 메시 소재의 등산복이었고 더벅머리는 오래 관리하지 않은 듯 턱까지 닿았다. 단단한 턱에는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나 있었다.


그런데 비쩍 마른 그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움푹 꺼졌으나 쌍꺼풀이 뚜렷한 눈. 두툼한 귓불 아래에 난 까만 점. 유달리 앞니가 큰 누런 치아. 나의 아버지. 그는 마치 잠든 듯이 죽어 있다. 엄마와 내가 매일 덮는 이불 위에 아버지가 머리를 대고 죽어 있다. 아버지의 생기 잃은 얼굴은 초췌하나 죽음이라는 강한 힘이 깃들었다. 얼굴의 요철에 고인 진한 어둠. 경건하고도 고요한 비극. 바로크 명화에서나 보던 초연함이 그에게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시체다.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나 하단 말인가? 내가 이 거대한 괴물을 죽였다고?


“아아… 어쩌면… 아아…”


나는 길 잃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어쩔 줄 모르는 채로 주위를 살폈으나 조치해야 할 어떤 방도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 내 머리 위에 얼음을 우수수 쏟아부은 것 같았다. 조금 지나서는 의문스러웠다. 왜 이 지경이 됐지? 왜 내가 아버지를 죽여야 했단 말인가?


5년 전,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과 함께 집을 나갔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돈을 꾸어가면서 이걸 밑천 삼아 무엇이든 이루겠다고 했다. 대리 기사를 한다고 했다가 지하철에서 물건을 판다고 했다가 편의점을 차리겠다고도 했다. 소선아, 기다려라. 아빠가 꼭 호강시켜 줄게. 소선이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참아라. 우리 소선이 쌍꺼풀 수술도 시켜주고, 여행도 보내주고, 마당 딸린 집에서 커다란 개랑 살게 해줄게. 나는 매번 아버지를 믿었고 매번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아버지는 엄마한테 돈을 빌리고, 외할머니한테, 외삼촌한테, 고모한테, 아버지의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동료에게,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고 대출 은행에서 대출 거부가 뜰 때까지 돈을 빌렸지만 끝내는 항상 경마장에 갔다.


아버지가 엄마의 신용 등급까지 8등급으로 떨어뜨리고서부터는 연락이 아예 끊겼다. 그때가 3년 전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는 내 생일에 보낸 ‘생일 축하한다! 내 보물에게’ 가 전부였다. 나는 ‘내 보물’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참을 쳐다봤었다. 나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아버지의 보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물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나를 버려두었겠는가? 끝끝내 나는 아버지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고 그 뒤로 3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3년 만에 나타나 벌레처럼 돈을 갉아먹고 떠나려 한 것이다. 우리가 예전에 주었던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엄마의 비상금을 훔치는 데에 쓴 것이다. 엄마가 아직도 아버지의 빚을 갚는 건 알까? 그동안 우리 생각을 한 번이나 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대체 뭐였을까?


이 죽음은 아버지가 자초했다. 나는 내일 아침 뉴스에 웃기지도 않은 꼴로 실릴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버지를 죽인 여고생……’ 나는 촉법소년도 아니었고 아는 변호사도 없었다. 꼼짝없이 감옥에서 20대를 다 보낼지도 몰랐다. 내가 가면 우리 엄마는 어떡하지. 엄마는 이 동네에서는 더는 못살지도 모른다. 이곳은 엄마의 직장이 가까운 곳 중에 가장 집값이 싼 곳인데. 종일 서서 일하는 대신 출퇴근 시간이 짧은 게 그나마 큰 위안이었는데. 엄마는 나를 서울에서 교육하겠다고 외조부모님 댁에 얹혀사는 것도 마다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이 손으로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워버릴 줄은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흔적도 없이 지우고 싶었다. 아버지만 없다면 이럴 일 없었는데. 아버지가 돈을 훔치러 오지만 않았으면 내가 그에게 소주병을 던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버지가 경마장을 제집 드나들 듯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집에 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떠나지만 않았으면 내가 그를 괴한으로 착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발목을 잡았다.


“아야야…….”


그때, 아버지의 시체로부터 가느다란 신음이 샌다. 나는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아빠? 정신이 들어?”


난 내가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가움이 어린 목소리를 냈다. 아빠가 반가운 건지 내가 살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운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아 부축했다. 키가 190에 가까울 정도로 거구인 아버지는 나 혼자 지탱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여, 여기가 어디.”

”우리 집이잖아. 아빠.”

“소선? 김소선이었나?”

“김소선. 아빠 왜 그래?”


아버지가 내 나이는 까먹은 적 있어도 내 이름을 까먹은 적은 없다. 이건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언제 뒤통수를 후려 맞았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꽥꽥 소리를 지르는 톤이 어딘가 어설펐다. 평소처럼 “개씨팔, 이런 화딱지 나는, 이런 멍청한 년이,” 이러지 않고 “이거 어떡해, 미쳤어 진짜!”하는 말투였다. 이렇게 호들갑 떠는 아저씨가 진짜 내 아버지가 맞나 헷갈렸다. 3년 만에 본 얼굴이라 다른 닮은 이를 아버지랍시고 헛짚었나 싶었다.


“아빠?”

“잘 들어. 나 너희 아빠 아니야.”


그 말에 놀랄 틈이 없었다.


“나 이은원이야.”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상한 표정이 지어졌다. 나는 그 터무니없는 소리를 단번에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난 한참 동안 정신 차리라고, 소주병 던져서 미안하다고 빌었다. 얼굴을 꼬집어도 봤고 멱살을 잡아도 봤다. ‘혹시’가 ‘설마’가 된 건 이은원의 자기소개 이후였다.


“맞다고. 나 2학년 7반 16번 이은원. 동그란 안경 썼고. 우리 담임 선생님은 최희영이고.”

“말도 안 돼. 무슨 영화도 아니구.”


그렇지만 아버지의 몸에 이은원이 들어간 게 아닌 이상, 아버지가 무슨 수로 이은원을 알겠는가. 내 옆 반에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를 말이다. 아빠는 같이 살 때도 내 친구를 몰랐다. 어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그 음침한 애’, ‘그 뚱뚱한 애’ 이런 식으로나 부를 줄 알았다. 내가 몇 반인지도 몰랐고 내 옆 반은 더더욱 몰랐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보다 이은원이 나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이은원에 대해 기억하는 건 별달리 없었다. 우린 옆반에서 어깨나 몇 번 스친 사이였다. 애초에 난 학교에 친한 애가 없었다. 그나마 은원이 제법 눈에 띄는 애였던 터라 다른 애들보다는 몇 가지를 더 기억할 뿐이다.


은원을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때였다. 걔는 첫 반 편성 배치고사에서 1등을 해서 입학 선서를 했다. 지루했던 선서 내용은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단상에 올라갈 때 조명에 반짝이던 그 애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인상에 깊게 남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는 어떻게 관리를 했는지 멀리서도 샴푸향이 다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마트에서 그때그때 1+1행사를 하는 샴푸를 집어오기나 하는데 말이다. 가끔 운이 나빠서 질 안 좋은 샴푸가 걸릴 때면 머리를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엿가락처럼 뚝뚝 끊겼다.


복도에서 종종 마주치던 은원은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였다. 여럿이 모여 시끄럽게 구는 무리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단란한 데다 하나 같이 성적이 높은 애들이었다. 2학년 올라와서는 그의 곁에 주로 진장미가 있었다. 둘이 단짝인가보다 했다. 또 은원은 종종 손에 집에서 챙겨준 것 같은 두유나 잘 깎은 사과를 들고 다녔다. 줄이지 않은 교복에 동그란 안경을 썼고 머릿결은 늘 단상에서 본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화장기 없이 뽀얀 피부에 다른 애들이 볼을 자주 꼬집어댔다.


올해 들어선 옆 반과 체육 시간이 종종 겹쳤기에 같이 피구 경기를 하고는 했다. 은원은 날다람쥐처럼 공을 재빨리 피하는 재주가 있었고, 나는 주로 흰 선 바깥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기에 이렇다 할 접점은 없었다. 그렇지만 딱 한 번, 우리의 시선이 얽힌 순간이 있다. 그때는 드물게도 피구공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기계적으로 공을 우리 반 에이스에게 패스하려다가, 내 옆에 있던 체육부장이 하도 손짓으로 빨리 던지라고 독촉하기에 어정쩡하게 서서 흰 선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내 코앞에 진장미가 보였다. 던지기만 하면 아웃일 게 틀림없었다.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그게 하필 진장미의 안면을 강타했다. 원래는 어깨를 맞았어야 할 공인데 진장미가 피하겠다고 몸을 뒤트느라 얼굴로 향한 것이다. 모래바람 부는 운동장에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구차하게도 그 사고가 단순히 실수였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은원이 온갖 호들갑은 다 떨면서 진장미를 보건실로 옮겼기 때문이다. ‘장미야. 괜찮니? 다치진 않았고?’ 그 애의 다정한 음성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사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보다는 더 미안해 보여야 할 텐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피구 경기는 재개되었고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나와 걔는 졸업 때까지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다. 걔는 나 말고도 어울릴 애들이 많았다. 우리 학교엔 여자애들이 족히 400명은 있었으니까.


“네가 왜 여깄어?”

”나도 몰라. 트, 트럭에 치였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뭐? 너 괜찮은 거야? 언제 치였는데?”

“조금 전인가, 아니, 잘 모르겠어.”


그럼 이은원도 지금 죽었다는 소리인가? 현실감 없는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영혼’, ‘영혼 바뀜’, ‘빙의’ 같은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봤지만 인기 웹소설이나 드라마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은원을 붙들고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봤지만, 마땅한 소득은 없었다. 은원은 그림자도 가지고 있었고 소금을 뿌려도 반응이 없었으며 핸드폰에 띄운 복숭아 사진은 그저 의아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내가 열을 낼 동안 은원은 우리 집을 신기하다는 듯이, 꼭 고시원에 처음 온 국회의원처럼 돌아다녔다. 그 꼴이 아니꼬워 비꼬고 싶었지만 우린 가까운 사이가 아닌 데다가 은원은 트럭에 치인 신세니 잘 대해주는 게 상식적으로 맞았다. 어느덧 시계가 7을 가리켰다.


“잠깐만. 조금 있으면 우리 엄마 오실 거야.”

“어, 음, 나 나가 있을까?”


은원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생다운 동작이었지만 아버지의 몸으로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한시가 급했기 때문에 일일이 놀라지 못했을 뿐이지 우스꽝스러운 광경인 건 틀림이 없었다.


나는 무릎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은원의 처우를 생각했다. 엄마와 아버지를 이대로 만나게 해도 괜찮을까. 엄마가 아버지를 마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모든 고난을 잊고서 아버지를 얼싸안으며 이제는 함께 살자고 할까. 엄마는 언제나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할 때면 ‘그래도 네 아빠잖아. 나는 네 아빠가 싫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답했다.


그래, 아버지는 결국 돌아왔다.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모든 걸 망쳐버렸다.


이전처럼 우리 가족 셋이 사는 상상을 할 수 없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구토가 치밀었다. 아버지가 내 인생을 어떤 식으로 망쳤는지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요리를 할 때면 아빠가 프라이팬을 집어던진 일이 떠올랐고, 카레를 보면 아빠가 카레 먹던 날 밥상을 엎은 게 생각났고, 의자를 보면 아빠가 의자를 집어던져서 손잡이가 빠져버린 게 떠올랐고, 생라면을 보면 아빠가 그게 네가 집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이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나는 아빠가 곁에 없어도 아빠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빠의 흔적은 온 세상 곳곳에 묻어 있었고 내가 방심한 순간에 간헐적으로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럴 때면 이 세상에 내가 있으면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일부러 괴롭히려는 듯이 이 세상에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땅을 마구 흔들어대는 듯한 기분 말이다. 땅 위에서 멀미를 하는 듯한 기분. 아빠를 떠올릴 때면 그랬다. 그런 아빠와는, 설령 그것이 아빠의 몸뚱이 뿐일지라도, 단 1초라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원이 필요했다.


“아니야, 여기 있어.”

“그럼 어떡해? 나더러 너희 아버지인 척하라고?”


바로 그거다. 은원이 아주 잠시만 나의 아버지가 된다면 엄마와 아빠 사이를 완전히 떨어뜨려놓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아버지의 실종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때문에 실종으로 인한 이혼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은원이 아버지가 된 지금 두 사람이 이혼한다면 아버지는 영영 내 인생에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고 ‘한시선’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아버지가 이어준 성姓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작명소에서 내 이름을 지었는데, 작명인이 소선과 시선을 제의하였으나 고민 끝에 소선을 택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버려진 이름인 시선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 이름은 내가 되지 못한 나의 다른 가능성인 것 같았다. 그 이름은 아버지에게 온전히 버려진 존재니까. 그걸 내가 주워다 쓰면 아버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한’은 우리 엄마 성씨였는데 흔해 빠진 김 씨보다 어감이 예쁘고 고왔다. 내 이름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의 흔적만 남기고 싶었다.


내가 한시선이었다면. 김소선이 아니라 한시선이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지금이라도 한시선이 될 수는 없을까? 이대로 아버지를 우리의 삶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이게 영화든, 아니든. 아버지가 나를 놀리는 거든, 뭐든 상관없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어도 상관없다. 같은 나이 여자애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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