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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별 Oct 11. 2023

은행원의 퇴근일지 1.치이는 하루


대규모 명예퇴직의 결과

일할 사람이 많이도 줄었다.


베테랑들이 그만둔 자리에는

선배들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는

신입직원들이 앉았다.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돈과 증서를 만지는 일에서


신입이 있다는 건

상당한 불안요소이다.


결국 말년차 대리인 나에겐

가장 많은 일이 할당되고


손이 안보이게 타자를 쳐도

1분 1초 일에 헐떡인다.


아침 8:35 에 출근하면

1번 고객님을 땡기는 9시까지


PC켜는데 10분

시재박스 나르기에 5분

대출신청을 하는데 10분


화장실을 갈까 말까 고민하다

셔터문이 열리고 만다.


지린다 지려.

치인다 치여.


오늘도 1번 고객님은

1번째 신입직원도 아닌

2번째 신입직원도 아닌

차장님도 아닌


나의 몫이다.


어느 날은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고객님까지 혼자 누르기도 했다.


쳐내고 쳐내도

화수분처럼 밀려드는 일.


포퓰리즘은 계속 정책을 바꾸고

전세사기 역전세 청년정책은

은행원까지도 괴롭힌다.


매번 바뀌는 규정과

100명이면 100가지 케이스인

대출을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둥글고 여유로운 사람을 동경해 본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처한 환경이 부럽다.


평생 담배를 핀 아빠 때문에

담배 피는 사람과는 연애도 안했지


최근 어느 날엔가 무의식적으로

담배가 미치도록 피고 싶었다.


마치 자학처럼

담배연기를 몸 속에 때려박아

아메리카노보다 더 쓴 쾌감으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다.


AI로 곧 대체될거라는

은행원의 일.


아직은 이 일이 존재함에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심사의견을 두 바닥 달아야 하는

대출 건이 또 접수된다.


지저스.


퇴근길의 나는

그야말로 시든 파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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