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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별 Nov 13. 2023

은행원의 퇴근일지 13. 한때는



벌써 세 번째 보는 분이다.


이름에 대한 기억력은 빵점이지만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나는

할아버지의 레파토리를 조심스레 기다린다.


내가 대출을 쪼까 받아서

건물을 사려고 하는데

대출이 되는가?


질문과 함께 종이 한 장을 내미시는

새하얀 머리의 80대 할아버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벽걸이 달력에

빼곡히 101호 부터 507호까지의

월세 내역이 적혀 있다.



고객님, 이렇게 방이 많으면

원하시는 한도가 어려울 수 있고

담보대출을 받으시려 해도 요즘엔

소득이 증빙되어야 하는데 가능하실까요?


내가 혼자서 사는게 아니여.

우리 아들 두명이랑 셋이 공동명의제.

첫째 아들이 서울대 의대 나왔고

둘째 아들이 예일대 교수여.

당연히 대출이 되는 것 아닌가?


아드님들 소득이 높으실테니

이런 경우엔 아드님 중 한분께서

직접 상담하시는게 좋지 않으실까요?

대출 받는 차주가 내용을 아셔야 하니까요.


멀리 있어.

나도 전에 서울 송파 살았는데

재개발 때문에 잠깐 여기 원룸서 지낸거여.

나한테 한 10억 있으니 대출 쪼까 껴서

월세 받으면서 살라고잉.


네...

아무튼 그렇다 해도

이렇게 임대차 내역만 갖고

물건 정보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담 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요.

계약 전이시니 등기부라도 가져오셔요.


그래?

알았어. 다시 오지.



처음 오셨던 날,

우리 아들이 의사라며


10억짜리 강남 전셋집에

전세자금 대출이 되나 물어보셨고


두 번째 오셨던 날엔

역시나 우리 아들이 의사라며

(그땐 분명 아들이 하나였는데)


강남에 집을 사면 대출이 나오는지

사뭇 진지하게 상담을 하셨다.



세 번째 비슷한 일의 반복.


할아버지가 자꾸 대출을 묻고

의사 아들의 직업을 밝히시는

숨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이

할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아들과

가깝게 지내시는 상태는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아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

혹은 아들이 그리운 할아버지가

선택하신 방법이 이것이지 않을까.


세상엔 참 많은 사연이 있고

많은 감정이 있다는 걸


자꾸만 마주하게 되는 요즘이다.


눈치 없이, 모른 척 하는 것이

은행원에게 맞는 역할이겠지만

왠지 함께 쓸쓸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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