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 보는 분이다.
이름에 대한 기억력은 빵점이지만
얼굴은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나는
할아버지의 레파토리를 조심스레 기다린다.
내가 대출을 쪼까 받아서
이 건물을 사려고 하는데
대출이 되는가?
질문과 함께 종이 한 장을 내미시는
새하얀 머리의 80대 할아버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벽걸이 달력에
빼곡히 101호 부터 507호까지의
월세 내역이 적혀 있다.
고객님, 이렇게 방이 많으면
원하시는 한도가 어려울 수 있고
담보대출을 받으시려 해도 요즘엔
소득이 증빙되어야 하는데 가능하실까요?
내가 혼자서 사는게 아니여.
우리 아들 두명이랑 셋이 공동명의제.
첫째 아들이 서울대 의대 나왔고
둘째 아들이 예일대 교수여.
당연히 대출이 되는 것 아닌가?
아드님들 소득이 높으실테니
이런 경우엔 아드님 중 한분께서
직접 상담하시는게 좋지 않으실까요?
대출 받는 차주가 내용을 아셔야 하니까요.
멀리 있어.
나도 전에 서울 송파 살았는데
재개발 때문에 잠깐 여기 원룸서 지낸거여.
나한테 한 10억 있으니 대출 쪼까 껴서
월세 받으면서 살라고잉.
네...
아무튼 그렇다 해도
이렇게 임대차 내역만 갖고
물건 정보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담 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요.
계약 전이시니 등기부라도 가져오셔요.
그래?
알았어. 다시 오지.
처음 오셨던 날,
우리 아들이 의사라며
10억짜리 강남 전셋집에
전세자금 대출이 되나 물어보셨고
두 번째 오셨던 날엔
역시나 우리 아들이 의사라며
(그땐 분명 아들이 하나였는데)
강남에 집을 사면 대출이 나오는지
사뭇 진지하게 상담을 하셨다.
세 번째 비슷한 일의 반복.
할아버지가 자꾸 대출을 묻고
의사 아들의 직업을 밝히시는
숨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이
할아버지의 자랑이었고
할아버지는 그런 아들과
가깝게 지내시는 상태는 아닐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아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
혹은 아들이 그리운 할아버지가
선택하신 방법이 이것이지 않을까.
세상엔 참 많은 사연이 있고
많은 감정이 있다는 걸
자꾸만 마주하게 되는 요즘이다.
눈치 없이, 모른 척 하는 것이
은행원에게 맞는 역할이겠지만
왠지 함께 쓸쓸해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