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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I May 30. 2020

오늘같은 날엔 편지를 쓰세요

컴퓨터 책상에 앉아 모니터와 

사랑하는 사이마냥 하루종일 마주보고 있으면

손가락이 근질근질하니 

무언가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걸 쓰자니 능력이 안되고,

대충 쓰자니 영 불만족스럽고

그럴 땐 편지를 쓰는 게 제일이다.


편지란, 잘 다듬어진 '사전제작물'이다.

생각나는대로 말로 내뱉는 것,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생방송이라 

실수할 때가 많다.


하지만 편지는 '초고-수정고-완고'를 거친

완벽한 사전제작물의 형태이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고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는 

단짝친구 '지혜'에게 주로 편지를 썼다.

우린 교환일기를 썼고,

때때로 생일이나 학년이 바뀌는 특별한 날에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지혜는 글씨를 잘 썼고, 나는 글씨를 못 썼다.

대신에 나는 글씨체가 많았다.

적어도 열가지의 글씨체를 바꿔 쓸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글씨, 정자체 글씨, 각진 글씨, 동그란 글씨, 귀여운 글씨 등등

노트필기를 할 때도 

내 기분 내키는대로 글씨를 바꿔 쓸 수 있었지만

지혜만이 쓸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어른 글씨체는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었다.

부러웠지만,

난 나름대로 편지의 내용에 신경을 썼다.

한 학년을 보내면서 고마웠던 점,

즐거웠던 추억,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내자 등등의 동심이 묻어나는 편지를

아마 지혜는 더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서는 편지를 쓰는 일이 없어졌다.

고등학교 때도... 나는 편지를 쓸 기회조차 없었다. 바빴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군입대를 한 중학교 동창 친구들에게 종종 편지를 쓰는 일이 생겼다.

그 중 '대기'라는 친구와 

특히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글씨를 뛰어나게 잘 쓰는 아이 중 하나였다.

축구를 좋아해서

늘 해외 축구팀 유니폼만 입고 다니던 대기는

유독 감성적이고, 글씨를 잘 쓰며,

좋은 노래를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똑똑하기도 했다.

그리고 '메시'와 '소녀시대 티파니'를 좋아했었지 아마


대기에게 편지를 쓰면 언제나 내가 쓴 분량의 두배가까이 되는 내용을 담은 정성스러운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주로 요즘의 내 근황을 묻고, 자신의 군생활을 얘기하고, 또한 친구들의 소식들을 담았다.

특별하게 할 얘긴 없었지만 

나도 열심히 편지를 썼고,

글씨체가 마음에 안들 때는 

편지지를 버려가면서 여러번 다시 쓰곤 했다.

예쁜 편지지를 고르기 위해 시내의 한 문구점에서 

1시간을 서성이던 때도 있었다.

물론 대기를 이성적으로 좋아해서는 아니다.

다만, 편지를 주고 받는 친구인만큼 알 수 없는 책임감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해서

나 또한 아주 잘~ 쓴 편지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 이외에 다른 친구들 혹은 대학 때 만난 선배들에게도 가끔 군에서 편지가 올 때가 있었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게다가 글씨도 삐뚤빼뚤, 도대체 20년간 뭘 배운건지 맞춤법이나 내용의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뜬금포 편지들을 읽을 때면, 이걸 답장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러번 고민할 때가 많았다.

차라리 전화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가 제대를 하면서 

우리의 편지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하지만 친구의 손때묻은 편지는 

아직도 내 서랍에 고이 보관되어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우정의 증거물과도 같은

내 순수를 증명해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기록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편지를 쓸 자신도,

써서 보낼 친구도 없지만

이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편지 아닌 편지를 쓸 일이 생겼다.


전화통화, 면대면 대화에서 

도저히 실마리를 풀 수 없을 때,

종종 이메일을 쓰곤 했다.

이메일 내용은 주로 이랬다.

직접 만났을 때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던 나의 감정과 서로의 오해,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

조금이라도 솔직한 내 심정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길고 긴 내 이메일을 읽으며 어느정도는 내 감정에 공감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글을 읽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메일을 보내놓고도 몇일동안을 

내가 쓴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혹시나 잘못해석할 부분이 있진 않을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역시 '편지를 쓰길 잘했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잘 다듬어진 내용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글을 썼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편지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 편지가 더이상 힘이 없다는걸 알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노력도 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랜 기간 나의 편지를 받아준 지혜, 대기,

그리고 몇몇 친구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늘 고마웠고,

또한 미래에 다른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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